우크라이나 역사③…민족주의 태동과 좌절
우크라이나 역사③…민족주의 태동과 좌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14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에서 출발, 흐루셰프스키의 역사연구와 독립운동

 

19세기는 만족의식 각성의 시대였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투르크의 거대제국 영내에 부속품처럼 끼어 있던 약소민족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국가적 독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체크, 슬로바크, 크로아티아, 헝가리, 핀란드,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에 민족적 독자성을 탐구하는 지식인의 흐름이 생겼다. 연구자들은 민족의 언어, 민속학적 특성을 발굴했고, 민족의 과거를 추적했다. 민족 지식인들은 압제자의 논리로 덧칠해진 기성의 역사에 반발해 자기민족의 독자적 역사를 그려냈다.

 

우크라이나 지식인 사회에서도 민족적 각성이 일어났다. 1845~1847년 사이에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이라는 비밀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 최초의 근대적 정치결사로서 이정표를 남겼다. 이 조직은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제국 내에서 우크라이나의 지위 향상을 추구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한 젊은 학자, 시인, 작가, 교사, 법률가, 학생등 지식인들은 니콜라이 1세 치하 러시아 제국에서 억압당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계몽하고자 했다. 이들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탄압받고 고초를 겪었다. 이 형제단의 역사는 짧았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에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차르주의자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키예프 공국과 같은 뿌리를 두고, 언어, 문자, 종교를 공유하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라 주장했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요구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짓눌렀다. 제국은 러시아를 대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로 구분하며, 범슬라브주의의 기치 아래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를 강요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시인으로 불렸던 타라스 셰브쳉코(Taras Shevchenko)도 혹심한 시련을 겪었다. 러시아 제국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동부 우크라아니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던 지식인들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서부지역으로 도피했다.

 

우크라이나 지폐에 그려진 흐루셰프스키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지폐에 그려진 흐루셰프스키 /위키피디아

 

20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인들 사이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이 있는지,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별도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남부지방이고,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공국에서 모스크바공국. 러시아제국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역사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특히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제국의 변방, 우크라이나인을 약간의 사투리를 쓰는 지방인 정도로 여겼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어로 변방(borderland)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고, 영어에서도 1990년대까지 정관사 ‘the’를 붙여 ‘the Ukraine’으로 표기했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별개의 민족, 나라로 만든 사람은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 1866~1934).

흐루셰프스키는 역사학자였다. 그는 러시아 역사에서 우크라이나를 분리했다. 그는 키예프공국과 모스크바공국의 연계성을 차단했다. 흐루셰프스키는 키예프 루스 공의 가계와 모스크바 대공의 가계는 별도이며, 뒤섞일수 없다고 못밖았다. 나아가 키예프 공국이 몽골에 멸망한 후 할리치나, 볼르인, 리투아니아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모스크바 공국이 키예프공국을 계승했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라는 제국의 서술에 반기를 든 것이다.

흐루셰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차별성의 근거로 키예프 루스, 정교, 코사크, 우크라이나어를 들었다. 그는 키예프공국의 땅에 그리스정교를 믿는 사람들이 우크라이나를 형성했고, 코사크들이 우크라이나 국가의 초보적 형태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키예프공국이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건너온 바이킹족(바랑인)이란 기존의 역사관을 부정했다. 흐루셰프스키는 키예프 루스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원했으며, 모스크바까지 세력을 확대한 것으로 정리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몽골에 복속하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치하에서도 정교를 유지함으로써 독자성을 이어갔다고 설파했다.

그는 유라시아 초원에 세력을 형성한 코사크(Cossacks) 무력집단을 우크라이나 민족으로 보았다. 코사크는 유목민으로 전사 집단을 형성했다. 코사크는 부족별 자율성과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지도자(헤트만)을 선출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했다. 흐루셰프시키는 선배 역사가들의 주장을 계승해 코사크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하지만 코사크는 비적떼와 같은 못된 일도 저질렀고, 때론 러시아, 오스만, 폴란드에 기웃거리며 충성 대상을 수시로 바꾸었다. 그는 코사크의 그런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1917년 우크라이나 키예프 소피아광장 모인 독립시위 인파 /위키피디아
1917년 우크라이나 키예프 소피아광장 모인 독립시위 인파 /위키피디아

 

민족주의 운동의 최종 목펴는 독립국가 수립이다. 독립은 천지가 개벽하는 격변기에 이뤄진다.

우크라이나도 두 번의 독립 기회를 가졌는데, 그 첫 번째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체제가 붕괴된 때였고, 두 번째가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이 해체되던 때였다. 첫 번째 독립운동은 실패했고,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러시아 군은 독일-오스트리아에 패주했다. 19172월 혁명이 일어나고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러시아에 혁명정부가 들어섰다. 이 틈을 이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3월초 의회 격인 중앙 라다(Central Rada)를 결성하고, 흐루셰프스키를 중앙 라다의 의장으로 선출했다. 흐루셰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인민들의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때라고 판단해, 그해 11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가 나라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하르키프를 중심으로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어 두 개의 정부가 양립하게 되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한 영토분할 /위키피디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한 영토분할 /위키피디아

 

민족주의자들이 의도한 독립국은 실현되지 못했다. 1918년초, 볼셰비키 군대가 키예프로 들어와 점령했다. 중앙 라다는 피신해 독일군의 개입을 요청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대가 우크라이나로 밀고 들어와 키예프를 점령했다.

독일군은 흐루셰프스키의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코사크 귀족 출신인 파블로 스코로파드스키(Pavlo Skoropadskyj)를 헤트만으로 내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흐루셰프스키는 정치에서 손을 떼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볼셰비키와 독일이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역을 체결한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일 점령지가 되었다. 곧이어 독일이 패망하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분리되고, 동서의 두 공화국이 19191월에 통합을 선언했다. 이에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반대하는 폴란드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폴란드가 침공했다. 이어 볼셰비키들이 침공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했다. 1919년초엔 안톤 데니킨의 백군이 키예프 인근으로 진격해 볼셰비키와 싸웠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세력들의 영역은 쪼그라들다가 마침내 소멸되었다. 최종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의 수중에 떨어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이 수립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17~1921년 사이에 여러개의 나라들이 세워져다 무너졌지만 민족주의 정권이든 독일 괴뢰정권 또는 볼셰비키 정권이든 모두 우크라이나라는 국명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국가 수립을 추구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민족적 요구는 소련내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자치권을 확보한 점에서는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1922년 수립된 소련은 민족문제를 연방제로 수렴하기로 하고, 우크라이나를 연방공화국의 하나로 편성해 언어적, 문화적 독자성을 존중했다.

흐루셰프스키는 1919년에 망명했다가 1924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의 허가를 받아 입국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독립이라는 최종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소련내 자치공화국으로 우크라이나를 유용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귀국후 역사연구에 더욱 정진했다. 1931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은 흐루셰프스키의 역사관과 사상을 위험한 것으로 파악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추방해 모스크바에서 살게 했다. 1934년 겨울 흐루셰프스키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다.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Ukraine

Wikipedia, Mykhailo Hrushevsky

Wikipedia, Ukrainian War of Independence

한정숙, 역사서술로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내다, 2014, 서울대 러시아연구소

한정숙,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과 근대 우크라이나의 민족 정체성, 2002, 서울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