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⑤…오렌지 혁명과 그 한계
우크라이나 역사⑤…오렌지 혁명과 그 한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1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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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후 혼란의 30년…동과 서의 지역대결 심화, 친러-친유럽파의 갈등

 

1990년 미하일 고르바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개방 바람이 우크라이나에도 밀려왔다. 그해 121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서부도시 르비브 사이 482km30만명이 서로 손을 잡고 인간사슬을 형성했다. 그날은 1919년에 최초의 독립국을 세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통합을 선언한지 71년째 되는 날이다. 그들은 소비에트기를 버리고 청색과 황색으로 된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었다.

우크라이나에선 1989년에 인민운동(People's Movement)이라는 반공산당 정치단체가 조직되어 독립을 요구했다. 이 단체가 인간사슬 시위를 주도하고, 70여년전 인민정부의 독립을 소환한 것이다. 이어 우크라이나 그리스정교가 첫 주교회의를 열어 모스크바의 러시아정교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종파를 형성한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의 진원지는 의회였다.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으로 다당제가 도입되고 199034일 총선에서 공산당 독점이 종식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주의 정파가 비록 소수였지만 26%의 의석을 차지했다. 공산당 의원들도 민주화, 민족 독립의 대세에 추수했고, 그해 7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주권국임을 선언했다.

의회 의장인 레오니드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의 변신은 빨랐다. 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선전부장 출신인 그는 19918월 소련 공산당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잽싸게 공산당을 탈당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민족적 열망에 올라타고 독립국 초대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의회는 824일 독립에 관한 법을 통과시키고,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와 대통령 선거를 동시에 실시한다고 결의했다. 1991121월 실시된 투표에서 우크라이나인의 92.26%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를 지지했다. 크림 자치주에서도 54%, 동부 루한스크, 도네츠크, 하르키프에서도 80%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크라프추크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연방 해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와중에 우크라이나에서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연방은 와르르 무너지기 직전의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쐐기를 박았다. 옐친은 128일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Stanislav Shushkevich) 소비에트 의장을 만나 연방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소련은 해체되었고, 우크라이나는 다른 14개 공화국과 마찬자지로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 우크라이나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라루스의 슈시케비치 의장이 1991년 12월 8일 연방 탈퇴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 우크라이나 크라프추크 대통령, 벨라루스의 슈시케비치 의장이 1991년 12월 8일 연방 탈퇴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는 독립한 다른 공화국들처럼 공산체제를 종식시키고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시장경제 운영에 미숙했고, 연방 해체로 원재료와 상품의 수급체인이 무너졌다. 러시아를 비롯해 구소련 소속 모든 공화국들이 독립 이후 경제 후퇴를 경험했지만, 그중에도 우크라이나가 가장 심각했다. 독립 직후 우크라이나 경제는 연 10% 이상 위축되었고, 1994년엔 20% 축소되었다.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지불유예)의 먹구름은 우크라이나 경제에도 밀려왔다. 여전히 공공기관을 차지한 옛공산주의자들은 관료적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부패가 만연했다. 돈이면 뭐든 할수 있다는 생각은 사회를 오염시켰고, 미숙한 민주주의는 정치인들을 타락시켰다.

지역 갈등도 심화되었다. 공산 치하에선 이념이 지역적 이질감을 덮어버렸지만 독립과 민주주의, 시장경제가 동시에 찾아오면서 서로의 차이점이 증오로 표출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나라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드네프르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눠진다. 동쪽은 300여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러시아화가 많이 진척된 반면에 서부는 오스트리아, 폴란드,의 지배와 독일의 침공을 받으며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또 동부 사람들은 친러시아 경향인데 비해 서우크라이나인들은 유럽을 선호한다.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의 시위대. /위키피디아
200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의 시위대. /위키피디아

 

2004년 대통령 선거는 동부와 서부의 지역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동부를 대표해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총리가 출마했고, 서부를 대표해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가 이에 맞섰다. 야누코비치는 여당 후보로 친러시아 성향을 드러냈고, 야당후보 유셴코는 부정부패 척결과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했다. 야누코비치 지지자들은 파란색, 유셴코 지지자들은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각자의 후보를 응원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결선투표에서 49.5% 46.6%로 야누코비치가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선거감시단의 보고, 언론의 제보 등이 쏟아지면서 서부 우크라이나인을 중심으로 선거부정 시위를 벌였다. 시위자들은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옷을 입거나 오렌지색 목도리를 걸쳤고 오렌지색 깃발을 휘두르며 재선거를 요구했다. 결국 대법원이 유례 없는 재선거를 치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해 1226일 실시된 재선거에서 유셴코는 52%를 얻어 44.2%를 얻은 야누코비치를 8%P의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세계의 언론들은 오렌지색 물결의 시위대에 주목해 오렌지 혁명이란 용어를 만들어 냈다.

 

2009년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과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 /이키피디아
2009년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과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 /이키피디아

 

오렌지 혁명은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의 시민혁명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의 지역성에 의해 빛을 바랬다. 부정선거 혐의를 받은 야누코비치의 정치생명은 끝나지 않고 동부지역에서의 지지기반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유센코 대통령 임기 5년 동안에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추진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골이 깊이 패이기 시작했다.

유셴코는 집권 초기에 정치적 동지이자 인기 있는 여성 정치인 율리아 티모셴코(Yulia Tymoshenko)를 총리로 임명했지만, 동지였던 두 정치인은 곧바로 충돌해 적이 되었고, 유셴코는 티모셴코를 총리에서 해임했다.

20063월 총선에서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이 최대의석을 차지해 총리 자리를 넘보았다. 유셴코는 정국안정을 위해 오렌지 혁명의 원흉이었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셴코와 야누코비치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하고 20074월 유셴코는 의회를 해산했다. 새로 치러진 총선에서도 야누코비치의 지역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티모셴코가 연정 구성에 성공하며 총리 자리를 다시 꿰어찼다.

 

극심한 정치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2010년 대선이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 유셴코는 5.45%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고, 야누코비치와 티모셴코가 결선투표로 가게 되었다. 결선투표에서 야누코비치는 49%를 얻어 45.5%를 얻은 티모셴코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야누코비치는 집권하자 2011년 정적인 티모셴코를 권력남용 혐의로 기소했고, 그녀는 7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지속되는 가운데, 동과 서의 지역간 분열도 심화되었다.

오렌지 혁명의 주인공들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타도의 대상이 된 세력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혁명의 반동은 새로운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Ukraine

Wikipedia, Orang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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