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⑥…유로마이단과 크림 사태
우크라이나 역사⑥…유로마이단과 크림 사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1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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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코비치의 EU가입 서명 거부로 유혈사태 촉발…러시아, 크림 합병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러시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유럽연합(EU)에도 가입해 양쪽에서 꿀물을 빨아들일 생각을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2010~2014년 사이 우크라이나 경제는 유럽 재정위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성장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러시아 일변도의 경제교류를 다변화해 유럽과의 교역 비중을 높이고 유럽자본율 적극 유치할 생각을 했다.

야누코비치는 2012년부터 EU 가입협상을 벌였다. EU는 민주화 성숙도가 미숙하고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에 규제완화 조치를 요구했다. EU는 또 야누코비치의 정적인 율리아 티모셴코의 석방도 요구했다. 야누코비치는 마뜩치 않았지만 국내 여론, 특히 서부우크라이나에 기반을 둔 야당의 주장을 수용해 법률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방해자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형제국으로 생각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해 관세도 낮춰주고 천연가스를 유럽보다 싸게 팔았다. 러시아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옛 소련 소속 국가들을 묶어 EU에 대항하는 유라시아 꽌세동맹을 추진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EU에도 가입하고 유라시아 경제동맹에도 가입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는 옛러시아제국,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별렀고, EU와 동진을 저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막으려 별반 조치를 다했다.

201381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는 모든 상품에 대해 통관을 중단했다. 이는 EU 가입절차가 진행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우크라이나 정치인에게 확인시켜준 메시지였다. 그후 통관을 풀렸지만 러시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에 베풀던 관세혜택을 줄여버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최대교역국이었다.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는 바람에 그해 우크라이나 수출은 전년대비 10%(10개월간 14억 달러) 급감했다. 산업생산도 5%정도 가라앉았다.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어를 하는 동부지역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정치인이었다. 러시아의 경제 제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과정에도 EU 가입 절차는 진행되었고, 2013925일 집권당 솧속인 볼로디미르 리바크 의회의장은 EU가 요구하는 모둔 규제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소련 해체후 우크라이나 성장률 추이 /위키피디아
소련 해체후 우크라이나 성장률 추이 /위키피디아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흔들렸다. EU에 가입하면 러시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중도에 가입절차를 중단하자니 서부우크라이나의 지지를 얻고 있는 야당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EU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기의 진영으로 끌어 당기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EU는 차관과 원조 형태로 200억 유로(27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했고, 러시아는 15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했다. 지원 규모에서 유럽이 더 많지만 조건은 러시아쪽이 후했다. 유럽은 까탈스런 이행조건을 내세운데 비해 러시아는 그런 조건을 제시해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는 당시 1,000큐빅미터당 400달러 하던 천연가스를 3분의2가격인 268 달러에 공급하겠다고 제의했다.

부채는 언젠가 갚아야 하는 것인만큼 러시아의 조건이 유리했다. 게다가 EU 가입은 지금 유예하더라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가입해도 된다. 야누코비치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수 없다.

대통령은 결심을 질질 끌었다. 하지만 1128~29일 리투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리는 .EU정상회의까지는 결정해야 했다. 1129일에는 우크라이나의 가입 세리머니가 예정되어 있었다.

11월 들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EU 가입 서명에 우물쭈물하는 것이 눈에 띠었다.

 

2014년 키예프 독립광장의 유로마이단 시위 /위키피디아
2014년 키예프 독립광장의 유로마이단 시위 /위키피디아

 

201311212,000명의 시위자들이 수도 키예프 독립광장’(Maidan Nezalezhnosti)에서 EU가입을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야당 인사 누군가가 그 시위를 유로마이단’(Euromaidan)이라고 부르며 트윗했다. 우크라이나어로 광장을 마이단이라 하고, 유럽 가입을 요구한다고 해서 지어진 신조어였다. 이후 시위를 유로마이단 시위라 불렸다. 시위대는 하루 5만에서 20만명으로 불어갔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1129일이 지나도록 EU 가입에 서명하지 않았다.

당시 우크라이나 여론조사에서 EU 가입을 희망하는 여론이 45~50%였고, EU 가입을 반대하는 여론이 42~50%였다. 동부와 서부의 여론이 극명하게 갈렸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반대자들을 잘 설득하고 야당과 시위자들이 합리적으로 의견을 제기했더라면 폭력사태와 정권교체, 러시아군대의 개입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피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측이 강경하게 대치했다. 누가 먼저 폭력을 썼는지가 중요치 않다. 정교회가 나서서 자제를 요청했지만 폭력의 양상은 격화되었다. 야누코비치가 장악한 의회는 시위진압법을 만들어 탄압을 정당화하자 시위대는 시위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2014년초 유로마이단 장악지역(갈색)과 탈환시도지(회색) /위키피디아
2014년초 유로마이단 장악지역(갈색)과 탈환시도지(회색) /위키피디아

 

해를 넘기며 시위는 내전 양상으로 변했다. 시위대는 방패와 투석기, 철봉을 휘둘렀고, 진압경찰도 발포했다. 218일 키예프 시내에 2만명의 시위대는 의회로 행진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발포했다. 양측이 서로에게 폭력을 사용하며 하룻동안에 82명이 사망하고 1,100명이 부상당했다. 경찰 사망자도 13명이나 되었다. 이날을 계기로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각 지방의 정부청사를 장악하며 권력 접수에 나섰다.

221일 독일, 프랑스, 폴란드가 중재에 나서 야누코비치 정부와 야당 사이에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양측은 각 정당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연내에 조기 대선을 치르기로 했다. 이 합의를 믿지 못하는 과격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합의가 야누코비치가 시간을 벌려는 수법으로 받아들인 타협안으로 파악하고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222일 시위대는 대통령궁을 점거했다. 의회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과 야당 대선후보였던 율리아 티모센코의 석방 안건을 올려 의결했다. 결의안은 재적의원 450명 가운데 328명이 참석,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 일부는 불참함으로써 의사를 표시했고, 일부 여당의원은 사위대에 동조했다. 야누코비치는 동부 국경지역으로 도주해 러시아로 망명했다.

52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페트로 모로셴코 후보가 54.7%를 얻어 결선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되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 /위키피디아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상황이 악화되고 있을 때 러시아는 10만명의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그해 2월 소치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바람에 러시아는 개입을 자제하다가 올림픽이 끝나자 바로 크림반도를 접수했다.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 영토였으나,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 니키타 흐루쇼프가 연방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로 떼어준 것이다. 명분은 우크라이나 코사크 추장이 러시아 차르에 복종한 페레야슬라브 회의 3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었다.

크림반도는 러시아인들이 절반이상 살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내에서 자치공화국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20142월 야누코비치가 축출되고 유로마이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러시아는 크림반도 내 친러파들을 부추겼다. 이 기회에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해 러시아에 붙으라는 것이다.

올림픽은 223일 끝났다. 227일 러시아 특수부대가 크림자치공화국의 의회와 정부청사를 접수하고 의회를 소집했다. 크림 의회는 아나톨리 모히리오프 총리를 해임하고 세르게이 악쇼노프(Sergey Aksyonov)라는 의외의 인물을 총리로 당선시켰다. 그는 지방의회 100석 중 3석만 보유한 소수정당을 이끌었는데,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사태가 확산되자 크림반도에 친러 자경단을 조직하는 등 친러 강경파 인물이었다.

31, 약쇼노프는 러시아에 군대 지원을 요청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기다렸다는 듯 그날로 2,000명의 무장병력을 크림반도에 투입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에 강력한 경고를 던졌으나, 말 뿐이었다.

그후 사태는 일사천리로 전개되었다. 36일 크림공화국 의회는 316일에 러시아와의 독립여부를 주민투표를 결정했다. 311일 크림자치공화국 의회와 수도인 세바스토로폴 의회는 동시에 자치공화국의 독립을 결의했다. 주민투표에서 투표자의 96.77%가 독립을 의결했다. 318일 크림자치공화국은 크림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320일과 21일 러시아 하원과 상원은 크림 공화국과의 병합 조약을 각각 비준했다. 326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한달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크림반도 영유권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변경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Economy of Ukraine

Wikipedia, Revolution of Dignity

Wikipedia, Annexation of Crimea by the Russian Fe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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