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태국①…저주에 사로 잡힌 차크리 왕조
근대 태국①…저주에 사로 잡힌 차크리 왕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2.2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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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부터 240년간 이어온 현 왕조…150년 또는 9대 종말설에 휩쓸려

 

태국은 아시아에서 왕정을 유지하는 몇 안되는 나라다. 태국 국왕은 입헌군주제도를 받아들여 의회와 총리에 많은 권한을 위임했지만 아직까지도 다른 왕정국가에 비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다. 국왕을 모독하면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정도로 군주의 힘이 강하다.

차크리 왕조 문양 /위키피디아
차크리 왕조 문양 /위키피디아

현재 태국 국왕은 2016년에 즉위한 마하 와치랄롱꼰(Vajiralongkorn)이다. 이 왕은 차크리 왕조의 10번째 군주이며, 라마 10세라고도 불린다.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1772년 차크리 장군이 톤부리 왕조의 탁신 왕을 타도하면서 시작되어 올해로 240년이 된다. 라따나꼬신(Rattanakosin) 왕조라고도 하는 이 왕조는 영국·프랑스 제국주의 압박에도 국가를 보전했고, 1·2차 대전, 동서 냉전의 고비를 넘기며 왕국을 이어갔다. 아시아에서 태국 차크리 왕조보다 오래 왕국을 유지한 곳은 일본 이외에 없다.

 

왕조의 창시자 차크리 장군은 역성혁명으로 왕권을 빼앗았다. 권력을 찬탈한 왕조였기에 초기부터 저주에 사로잡혔다.

탁신왕(재위 1767~1782)은 미얀마(버마)에 점령된 샴을 해방시키고, 치앙마이, 라오스, 캄보디아로 영토를 확장한 영웅이다. 말년에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자신이 미래불이라며 광적인 행동을 하긴 했지만, 태국인들의 뜨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를 죽인 사람은 오랜 측근이자 심복이었던 차오 프라야 차크리(Chao Phraya Chakri) 장군이었다.

차크리는 탁신 왕을 잔혹하게 죽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차크리는 탁신을 부대에 넣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민중은 새 권력자에 저항하지는 않았다. 다만 옛 군주 탁신에 대한 숭배, 애정, 복종의 마음을 구전으로 이어갔다.

탁신왕이 죽은 날짜는 1782410일이다. 탁신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차크리의 후대가 10대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했다고 전해진다.

 

탁신을 죽인 후 차크리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는 탁신의 흔적이 남아 있는 톤부리(Thon Buri)를 떠나 차오프라야 강 건너 방콕(Bankok)에 궁궐을 짓고 수도로 삼았다. 따라서 차크리 왕조를 방콕 왕조라고도 한다.

샴에는 새 도시를 건설할 때 락 무앙(Lak Muang)이라는 기둥을 세우는 풍습이 있다. 그 기둥 주변에 사원을 짓는데, 이 사원이 도시의 중심이 된다. 차크리 왕은 방콕에 신성한 도시기둥(city-pillar)를 세울 곳을 물색했다. 그 곳이 현재 방콕의 락 무앙 기둥 사원(Lak Muang City Pillar Shrine)이다. 이 사원 안에 두 개의 기둥(pillar)가 있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락무앙 사원의 두 기둥 /위키피디아
락무앙 사원의 두 기둥 /위키피디아

샤크리 왕은 점성가들을 불러 기둥을 세울 시각을 알아보라고 했다. 새 수도의 가장 신성한 건축물이었으므로 좋은 시간에 기둥을 박아 넣어야 했다. 나무 기둥이 특별 제작되었고, 기둥이 들어갈 구멍도 팠다. 시간을 정해 기둥을 세우기만 하면 된다.

태국의 내로라는 점쟁이들이 모여 시각을 점쳤다. 점성가들이 점지한 시각은 1782421일 오전 654분이었다. 영험한 승려들이 밤새 불공을 드리고 시각을 기다렸다. 421일 동이 트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갑자기 네 마리 뱀이 나타나 기둥을 세울 구덩이로 기어 들었다. 새 시간을 잡느냐, 그대로 가느냐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들은 예정대로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기둥이 구멍에 들어가고 빈 틈이 메워졌다. 구덩이에 들어간 네 마리의 뱀은 짖이겨져 죽었다. 불교는 생명을 존중한다. 신성한 행사에 네 생명이 희생된 것이다.

이 사건이 전해지면서 시중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예나 지금이나 태국인들은 미신을 곧잘 믿었다. 전왕의 영혼이 살아나 뱀이 되었다는 뜬금 없는 얘기가 돌았다. 불길한 징조였다.

새 국왕은 점쟁이들에게 무슨 징조인지를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크리 불교에 정진했다. 불교타락을 명분으로 탁신왕을 제거했기 때문에 그는 불교 개혁을 단행했다. 승려들이 계율을 어기고 시장을 배회하거나 연극 공연에 기웃거리며 도박을 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단속했다. 불경의 골격인 삼장(三藏, Tipitaka)을 전면 개정했다. 차크리왕은 라마 1세라고 불리는데, 라마(Rama)는 부처님, 해탈한 승려라는 뜻이다. 이후 왕들은 라마 2, 라마 3세 등으로 매겨져, 현재 라마 10세에 이른다.

그렇게 불교를 닦으면서 초대왕의 즉위 7년은 무탈하게 지나갔다. 그런데 17895월 갑자기 화마가 닥쳐 궁궐이 전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왕의 여동생이 신점을 보고선 뱀들이 신 왕조를 멸망시키려 한다, 왕이 불경을 새로 만들고 불상을 세우는 등 공을 드린 덕택에 재앙이 늦춰졌다, 왕조가 150년은 갈 것이다는 점괘를 내놨다.

그렇게 해서 세월이 무던히 지나갔다. 하지만 후대의 왕들은 이 뱀 사건이 예고한 150년 시한을 앚지 않았다. 왕조가 세워진지 70년이 되던 1872, 초대 왕의 손자인 라마 4세는 점성가들에게서 좋은 의견을 들었다. 락 무앙 사원에 또하나의 기둥을 세우면 왕조의 저주를 극복할 것이란 얘기였다. 그렇게 해서 락 무앙 사원에 기둥이 두 개 세워지게 되었다.

 

프라풋타욧파 다리 /위키피디아
프라풋타욧파 다리 /위키피디아

 

그럼에도 저주의 루머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세월이 또 흘러 왕조 창건 150년이 되는 1932년이 가까워졌다. 어느 역술가가 톤부리와 방콕 왕궁 사이에 다리를 놓으면 탁신왕의 저주에서 풀릴 것이란 의견을 내놓았다. 라마 7세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1927년 당대로는 최대의 토목사업을 착공했다. 차오프라야 강을 건너는 다리는 왕조 창건자의 이름을 따 프라풋타욧파 다리(Phra Phuttayotfa Bridge)라고 명명되었다.

다리 준공은 차크리 왕조 150주년 기념일인 193246일로 정해졌다. 그날 군부에 쿠데타가 있을 것이란 루머가 있었으나, 별 사고 없이 조용하게 준공식이 치러졌다. 그렇다고 150년 왕조 멸망설은 식지 않았다.

진짜 쿠데타는 624일 일어나 청년장교들이 왕궁을 접수했다. 왕궁을 떠나 있던 라마 7세는 군부에 저항할 경우 유혈사태가 확산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군부의 집권을 수용했다. 군부는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라마 7세는 자진망명하는 형태로 퇴위했는데, 사실상 폐위된 것이나 다름 없다. 다음 국왕이 될 라마 7세의 아들은 어린데다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어 국왕 자리가 비어 있었다. 사실상 자크리 왕조가 끝난 것이다.

젊은 군인들은 나라 이름을 샴(Siam)에서 태국(Thailand)로 바꾸고, 국민들의 정신개조운동을 벌이는 등 본격적인 근대화작업을 벌였다. 결론적으로 150년후 망한다는 자크리 왕조의 저주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자크리 왕조는 2차 대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라마 9(부미폰 아둔야뎃)1946년에 측위해 무려 70년가을 재위했다. 그가 오래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조의 수명이 9대까지 갈 것이란 저주의 예언은 잠복하고 있었다. 2016년 그가 사망했을 때 또다시 루머가 떠올랐다. 하지만 부미폰의 아들 마하 와치랄롱꼰이 무사히 라마 10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Chakri dynasty

Wikipedia, Taksin

The Curse that Haunted Bankok 150 Years Until Now?

Revealing the source of the “death in ten generations“ comes from the Thai king“s curse 200 years ago. Is it really going to be fulfi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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