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선의 銀 제련 기술 훔쳐 갔다
일본, 조선의 銀 제련 기술 훔쳐 갔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0 1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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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위 은 생산대국으로 부상…도요토미 군자금으로 활용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1539)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전라도 전주판관) 유서종이 왜놈(倭奴)과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鉛鐵)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놈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합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법대로 죄를 정하소서.” (중종 34810)

 

일본이 조선의 은() 제련술을 훔쳐 가려고 무던히 노력하다가 마침내 그 기술을 훔쳐 갔다. 1500년대 전반에만 해도 일본은 은 광석을 배에 싣고 와 조선에 가져와서 제련했다. 은광석은 무거웠다. 왜상(倭商)들은 매번 은광석을 배에 싣고 조선에 가서 제련하는 것도 힘들었고, 제련비도 주어야 했다. 그러니, 그 기술을 가져가면 그런 수고를 덜고 제련비를 아낄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의 기술을 훔쳐 간 것은 현대적 개념의 기술 절도와 다를 게 없다. 여기에 조선인도 한몫 했다. 유서종이라는 지방관이 아마도 왜인들에게서 뇌물을 먹었을 것이다. 실록에 왜놈과 사사로이 통해서라는 대목이 그런 정황을 시사한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임기는 1년을 넘기지 않는 게 일쑤였고, 2년이면 긴 편이었다. 매번 일본 은광석을 제련해주고 비용을 뜯는 것보다 기술을 팔아 한번에 왕창 돈을 벌자고 유서종이 판단했을 것이었다.

유서종이란 지방관에겐 몇푼의 뇌물이었겠지만, 국가적으로는 엄청난 기술 유출이었다.

 

일본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 이와미은광(石見銀山) 관광 자료에는 이렇게 홍보한다.

 

회취법은 1533년에 하카타의 호상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한반도에서 초청한 게이주(慶寿)와 소탄(宗丹)이라는 기술자에 의해 일본 내에서는 처음으로 이와미긴잔 은광에 도입되었습니다. 이기법을 통해 은 정련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그 후 이쿠노(生野)은광과 사도(佐渡)금은광 등 전국 광산에 보급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은 제련 기술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1503)의 기록을 보자.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으로 은을 불려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제련 은 무쇠 화로나 용기 안에 뜨거운 숯을 조각조각 넣어서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 아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아뢰니,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 (연산 9518)

 

회취법 제련 방법 /일본 유노오쿠 金山博物館
회취법 제련 방법 /일본 유노오쿠 金山博物館

 

당시로선 첨단 은제련술인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조선에서 개발돼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기술은 회취법(灰吹法)이라고 불렸다.

조선에서 개발된 기술은 국내에서는 사장되고, 정작 일본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당시 조선을 드나들었던 왜상(倭商)들이 이 기술을 절도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제련기술은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채굴한 은광석을 쌓아놓고 닷새 이상 나무를 때서 가열시킨 후 남은 재에서 은을 추출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으로 제련을 하면 화목(火木)의 수요가 많고, 노동력도 많이 들어 경제성이 떨어진다. 제련된 은의 품질도 낮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 개발된 회취법은 당대 유럽의 은제련법보다 월등히 앞선 획기적 기술이었다. 스페인이 16세기에 볼리비아 포토시(Potosi)에서 사용했던 은 정제법은 수은아말감 공법이었다. 이 방법으로 대량의 은을 제련하면서 인디오 800만명이 수은가스 중독으로 죽어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스페인이 남미에서 은을 채굴하기 이전에 조선에서는 고도의 은제련법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은제련 기술을 훔쳐감으로써 제견과정의 인명 피해도 줄이고, 세계적인 은 생산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와미 광산 모습 /위키피디아
이와미 광산 모습 /위키피디아

 

일본에서는 14세기초(1308~1310)에 혼슈의 시마네(島根)현에 은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일대의 은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6세기초다. 1526년 하카다(博多:후쿠오카)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가 일대를 지나다가 바다에서 산이 빨갛게 빛나는 것을 보고 뱃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긴뿌산(銀峰山)인데, 옛날에 은이 나왔던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상인은 광부들을 데리고 와 산허리에서 은을 채굴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와미(石見) 은광은 수십년후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다.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된 은은 중국에 건너가 대량으로 유통됐고, 조선에서도 거래됐다. 이 은광을 놓고 일본 군웅들이 각축전을 벌였고, 이 곳을 장악한 세력이 일본을 통일했다.

 

이와미 위치 /위키피디아
이와미 위치 /위키피디아

 

처음에 은광이 발견됐을 때 은광석에 다량의 납이 함유돼 있었다. 은광석은 풍부했지만, 제련하는 기술이 후진적이어서 생산량이 늘지 않았다. 이때 조선에서 개발된 은 제련법이 일본에 건너왔다.

이와미 은광은 조선에서 훔친 회취법을 활용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일본 전역에서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은광산 개발에 열중했다.

16세기 중반에 일본은 남미 은광을 소유하고 있는 스페인에 이어 세계 2위 은 생산국으로 등장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말, 일본의 은 생산량은 전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은은 국제통화였고, 중국에선 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무역도시 하카다의 상인이 개발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이와미 은광은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섰다.

이익이 발생하는 곳엔 분쟁이 발생한다. 때는 강한자가 약한자를 잡아먹던 전국(戰國)시대였다. 처음엔 영주였던 오우치 가문이 이 광산의 운영권을 가졌지만, 곧이어 소영주 오가사와라 가문이 은광을 탈취했다. 다시 오우치 가문이 뺐는데 3년이 걸렸다. 오우치 가문은 은광 주변에 성을 요새화했다. 1537년엔 이즈모의 아마고 가문이 이와미를 공격해 은광을 빼앗았다. 2년후 오우치 가문이 탈환했지만, 다시 아마고 가문에게 빼앗겼다. 은광을 둘러싸고 두 가문의 쟁탈전을 계속됐다.

최종 승리자는 오우치 가문을 계승한 모리가문이었다. 그런데 모리 가문은 1584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복속한다. 이와미 은광은 모리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고, 토요토미는 임진왜란의 군자금을 이 곳에서 충당하게 되었다.

 

은광을 소유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손잡고 중국, 조선등 해외 여러나라와 무역을 했고, 수입품에는 조총도 포함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일본이 중국에 은을 팔아 이문을 남긴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1541)에는 지금 왜인들이 중국의 남쪽 지방에 은을 팔면 이윤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은을 사간다고 합니다라는 기사가 있다.(중종 361124)

일본 상인들은 일본에서 생산된 은은 물론 조선의 은도 가져가 중국에 비싼 값으로 팔았다. 중국사에서 이들은 왜구(倭寇)로 불렸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하기 이전에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왜구들은 중국 남부 절강·복건성 등지의 호족들과 손잡고 은을 거래했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왜란)으로 밀무역을 감행했다. 왜구들도 중국과 일본 사이의 환차익을 알았다. 중국에서의 금·은의 교화비율(16)과 국제적 환율(112)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고, 일본상인들은 조선의 은도 가져가 환차익을 챙겼던 것이다.

 

이와미 광산 입구 /위키피디아
이와미 광산 입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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