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군 몰아낸 곳에 호암산성
당나라군 몰아낸 곳에 호암산성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3.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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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 한우물 설치…임진왜란 때엔 한양수복 후 수도방어의 요새

 

호암산성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과 안양시 석수동 사이 경계에 있는 해발 347m의 조그만 산봉우리에 축성한 산성이다.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을 헸다고 하여 호암산(虎岩山)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범뫼라고 부른다고 한다. 호암상은 삼성산의 지류에 솟아오른 지봉(支峰)이다. 그 아래의 절이 호압사(虎壓寺)이니, 호랑이와 연관성이 많은 산이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쪽에 안양천을 끼고 발달한 넓은 평지가 눈에 들어온다. 개발연대에 거대한 공단지역이었던 곳이 지금은 주거지로 변해 있다. 도시가 발달되기 이전에는 비옥한 농경지였고, 이 들판은 멀리 한강이 남으로 펼쳐져 수도 한양의 곡창지대였다. 이 들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경부선과 국도1호선이 지난다.

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한강 건너 용산과 남산, 북한산이 조망된다. 따라서 호암산성의 입지조건은 안양천 일대의 광야와 남북 교통로를 지키는 관문임을 알수 있다.

 

호암산성의 한우물 /박차영
호암산성의 한우물 /박차영

 

호암산 정상에 큰 연못이 하나 나타난다. 처음 본 사람들은 이렇게 높은 곳에 우물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연못 이름은 한우물’. 큰 우물이란 뜻이다. 또는 하늘의 연못이라는 뜻으로, 천정(天井)이라고도 한다. 이곳 유적지는 한우물 및 주변산성지라고 불리었으나, 2011년 호암산성(虎岩山城)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주소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 산83-1번지 외. 사적 3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성에서 우물은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일본 구마모토(熊本)의 번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공했다가 울산왜성에서 조·명 연합군에 포위되어 물 부족으로 오줌까지 받아먹고 말까지 잡아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귀국해 구마모토 성을 쌓으면서 우물을 120개나 팠다고 한다.

 

호암산성 발굴당시 한우물과 주변산성지 /문화재청
호암산성 발굴당시 한우물과 주변산성지 /문화재청

 

호암산성은 해발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퇴뫼식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1,250m. 성 내부에는 여러 건물터와 두 개의 연못터가 발견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류와 철기류,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산성 가운데 약 300m 구간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암산에서 내려본 금천구 일대 /박차영
호암산에서 내려본 금천구 일대 /박차영

 

한우물은 2개의 연못 가운데 제1호 연못이다. 군대가 산에 주둔할 때 사용할 물을 저장해두었던 곳이다. 연못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서 17.8m, 남북 13.6m의 장방형이며 깊이는 2.5m 가량이다.

서울대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한우물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고,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연못은 그 아래에 묻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우물의 조선시대 석축지는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이고, 그 아래에서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의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가 확인되었다.

우물은 지표 밑 30cm까지는 백자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그 아래에는 유물이 거의 없는 굵은 모래층이 있고, 이 모래층 아래에 뻘층이 계속되고 여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의 중심연대는 7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우물의 석축구조는 남동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져 있고, 석축의 제일 아랫단은 약 20cm 가량 앞으로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 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축조방법은 안압지의 축조수법과 동일한 것이다.

 

호암산 제2연못지에서 발굴된 청동 숟가락 /문화재청
호암산 제2연못지에서 발굴된 청동 숟가락 /문화재청

 

2연못지는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을 시굴하다가 발견되었다. 남북으로 18.5m, 동서 10m, 깊이 2m 이상이며, 한우물에 비해 가늘고 긴 행태다. 1989~1990년에 서울대박물관의 시굴조사로 발견되었는데, 그 이후 방치되었다.

2호 연못 발굴과정에서 잉벌내역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금천구 일대는 고구려 때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다. 따라서 이 숟가락의 주인은 이 지역에 역지(力只)라는 나마(內未) 계급의 토호의 것으로 추정된다. 군인 시절에 훈련 나가서 자기 이름을 써놓은 숟가락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시절이 기억난다. 숟가락이 계급을 상징하는 것은 신라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걸까. 청동수저 계급의 호족이 연못가에서 밥을 먹다가 잃어버린 숟가락이 수천년 후에 발굴된 것이다.

 

그러면 산 꼭대기에 판 우물의 용도는 무엇일까.

첫째 기우제 관련있다는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호암산에는 견고한 성이 있다. 성안에 연못이 있어 가물 때면 비를 빈다"고 했다.

둘째는 군사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부근에서 진을 쳤으므로 이 우물은 군사들의 식수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는 풍수설에 의한 소화용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호압사를 짓게 하고 방화신인 석구를 세우는 등 이 우물은 방화를 상징하게 했으리라는 것이다. 석구상은 호랑이 형상인 호암산을 풍수적으로 경계하는 의미로 세운 것이다.

 

호암산성 석구상 /박차영
호암산성 석구상 /박차영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구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서울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다고 한다. 삼성산은 불()의 기운이 강한 상이기 때문에 화마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우물 근처에서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서울대박물관의 발굴조사서 건물지 4곳에 확인되었고, 이 유적이서 12개 종류 1,313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 경주 안잡지 유적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따라서 상당히 많은 병력이 이 성에 주둔했고, 산 정상에 물을 확보하기 위해 우물을 팠던 것이다.

고고학계의 분석에 따르면 이 산성은 신라 문무왕 12(672)경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이 당나라 군대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한양벌과 서해 관문인 당항성(黨項城) 사이 길목을 지키는 요새로 중시했던 것이다. 그후 잊혀졌다가 임진왜란 때 한양 수복 후 왜군을 방어하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연못을 다시 팠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호암산 한우물은 중국과 일본의 외세를 쫓아내고 우리 땅을 수호하던 요충지였음을 알수 있다.

 

호암산성 개요 /박차영
호암산성 개요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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