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의 부하 네아르쿠스, 인도양 탐험하다
알렉산더의 부하 네아르쿠스, 인도양 탐험하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3.1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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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세기에 인더스강에서 바빌론까지 항해…인도양, 페르시아만 연안 탐사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에서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정복군주였다. 그의 전쟁은 주로 육지에서 전개되었지만, 그는 부하를 시켜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의 해상 정복에도 나섰다. 정복이라기보다 탐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알렉산더의 명령을 받고 망망대해로 뛰어든 탐험가는 네아르쿠스(Nearchus, BC 360~300) 또는 네아르코스(Nearchos)라고 불리는 제독으로, 지중해의 섬 크레타 출신이다. BC 334년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넌 알렉산더의 대군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을 쫓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를 정벌했다.

전쟁을 시작한지 8년째 되던 BC 326년 인도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더 이상 전쟁에 지쳤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간신히 군대를 진정시킨 후 벌어진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알렉산더는 회복했으나 더 이상 전쟁을 치르기 힘들었다. 정복자는 회군 명령을 내렸다.

알렉산더는 인더스 강에서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눴다. 1군은 크라테루스에 맡겨 북쪽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페르시아 수사(Susa)로 오도록 했고, 2군은 왕이 직접 인솔하고, 3군은 네아르쿠스에게 맡겨 바닷길로 페르시아까지 오도록 했다.

 

회군을 준비하는데 넉달이 걸렸다. 2군과 3군은 인더스강을 따라 함께 내려갔다.

네아르쿠스는 도중에 인도에서 설탕을 제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럽인이었다. 그는 벌의 도움 없이도 갈대의 줄기에서 꿀을 만들 수 있고는 크게 놀라며, 사탕수수를 가리켜 꿀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reed)’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이미 사탕수수 수액을 채취해 이를 끓여 설탕덩어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유럽에 설탕이 전해졌다고 한다.

알렉산더왕과 내아르쿠스는 인더스강과 인도양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로 헤어졌다. 대왕은 해안을 따라 행군하고, 네아르쿠스는 바다로 나갔다.

 

네아르쿠스의 항해로 /위키피디아
네아르쿠스의 항해로 /위키피디아

 

당시 그리스인들은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네아르쿠스는 자신의 탐험과정을 꼼꼼히 적어 놓았다.

그들은 미지의 바다를 떠나기 앞서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스 함대는 출항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크고 좋은 항구에 도착해 그곳을 알렉산더 항이라고 명명했다. 그 곳이 지금의 파키스탄 카리치로 확인되고 있다. 선원들은 굴과 섭조개, 갈치 등을 식량으로 삼아 33일간 머물다 서쪽으로 향했다.

 

파키스탄의 마크란 해안 /위키피디아
파키스탄의 마크란 해안 /위키피디아

 

네아르쿠스 함대는 험준한 절벽 지역을 지나야 했다. 그곳이 파키스탄 발로치스탄의 마크란( Makran) 해안이다. 그들은 좁디좁은 바위틈을 지나 넓직한 항구로 들어갔다. 현지인들은 이 항구를 여왕의 항구라 불렀다.

이들은 항해를 하다가 하늘까지 치솟는 파도를 만나 일부 배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해안을 바짝 붙어 항해함으로써 위험이 발생하면 바로 피항했다. 오랜 행해로 선원들이 피로감을 호소하면 해안에 정박한 후에 기력을 보충한 후에 다시 항해했다.

어느 해안에서는 원주민들이 돌창을 들고 공격해왔고, 또다른 곳에선 친절하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들은 돌과 창, 화살 등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당대 최신 장비를 갖춘 마케도니아군에겐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물과 식량을 구하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해안에 배를 대고 뭍으로 올라가 필요한 것들을 구해왔다. 마을 주민들이 협조를 하지 않으면 약탈을 했다. 그들은 인도양을 헤엄치는 고래를 보았다. 어떤 선원은 큰 물고기를 보고 깜짝 놀라 노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물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원주민도 만났다. 그들에게서 물고기를 잘게 갈아 전병을 만들어 먹는 요리법도 배웠다.

 

헬리니즘 영향을 받은 바레인의 석조물 /위키피디아
헬리니즘 영향을 받은 바레인의 석조물 /위키피디아

 

그들은 드디어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 사이를 좁게 가르는 후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 다수의 선박은 동쪽 해안을 따라갔으나, 일부는 서쪽 해안을 따라갔다. 지금의 오만에서는 현지 왕국의 거센 저항에 접근도 하지 못했지만 바레인의 부족에게선 친근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바레엔에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했다.

 

네아르쿠스는 페르시아만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2군이 가까운 곳을 행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왕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BC 324년 네아르쿠스의 해군은 대왕과 군대와 합류했다.

BC 323년 알렉산더는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에 머물렀다. 네아르쿠스의 함대도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대기했다. 네아르쿠스는 대왕에게 아라비아 반도의 공격을 건의했고, 알렉산더는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갑자기 병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후 아라비아 공격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네아르쿠스의 항해기간은 BC 326~324년 사이 2년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그동안의 항해일지를 정리해 연안항해기(Paraplus)를 썼으나, 그의 저서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내용은 아리아노스, 스트라보, 플리니우스 등 후대의 저술가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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