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왕은 왜 조선에 망명했을까
오키나와 왕은 왜 조선에 망명했을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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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쿠국, 고려·조선에 조공무역을 통해 문물 배워가…조선 문화 동경

 

일본 남쪽 오키나와(沖繩) 열도에는 류큐(琉球)라는 독립왕국이 500년간 존속했었다.

주섬인 오키나와 섬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가 출현했다. 안사(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부족을 지배했고, 족장들의 지위는 평등했다.

12세기경 부족들이 병합되면서 오키나와 섬에는 산남(山南), 중산(中山), 산북(山北)의 세왕조가 들어서 이른바 삼국시대가 열렸다. 1372년 명() 태조 주원장(朱元章)은 류큐 3국에 조공을 바치도록 해 세나라는 중국의 조공국이 된다. 오키나와의 삼국시대는 100여년간 지속되었다.

1416년 중산국의 왕 파지(巴志)는 북쪽의 산북국을 병합하고, 이어 1429년 남쪽의 산남국을 정복해 삼국을 통일했다. 파지왕은 슈리(首里)성을 수도로 정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한다. 명나라 선종은 파지에게 상()씨라는 성을 하사한다.

어렇게 해서 형성된 류큐(琉球) 왕국은 중국의 조공국이었고, 일본으로부터는 독립왕국으로 출발했다.

당시 일본은 각지의 유력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전국(戰國) 시대였고, 류큐를 세력권에 둘 여력이 없었다. 중국은 조선 다음으로 류큐를 우선시했다.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조선을 비롯해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개무역을 해 국부를 축적하고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오키나와 삼국시대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삼국시대 /위키피디아

 

오키나와에 통일 국가가 설립될 무렵, 남뽁의 산남(山南)이라는 패망국가의 왕이 조선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 전문(箋文)과 예물을 바치고, 피로되었던 (조선의) 남녀 12명을 돌려보내고, 망명한 산남왕(山南王)의 아들 승찰도(承察度)를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 나라 세자 무녕(武寧)도 왕세자에게 글을 올리고 예물을 바치었다. (태조 3, 139499)

유구국(琉球國)의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그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왔다. 사도(沙道)가 그 나라의 중산왕(中山王)에게 축출당하여 우리 나라의 진양(晉陽)에 와서 우거(寓居)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의식(衣食)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유리(流離)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의복과 쌀·콩을 주어 존휼(存恤)하였다. (태조 7, 1398216)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 등이 조회하여 뵈었다. (태조 7416)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 7인이 조회에 참예하였다. (태조 7년 윤521)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죽었다. (태조 71015)

 

조선 건국시기는 오키나와의 3국 통일시기와 맞물려 있다. 위의 기사는 태조 시기에 통일 전쟁에서 패한 산남왕이 조선으로 망명해왔다는 스토리다.

조선에 망명한 오키나와 왕은 산남왕 승찰도(承察度). 조선실록을 해석하면 승찰도가 중산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조선으로 망명했고, 승리한 중산국왕이 산남왕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류큐 역사와 대조하면 조금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승찰도는 류큐 산남국의 초대 국왕으로 재임기간이 1314~1398년이다. 무려 84년이나 산남국을 다스렸다는 얘긴데, 신라 박혁거세(61)보다 길다. 신화와 같은 기록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다만 승찰도가 조선왕조실록에 망명한 사실이 기록된 해가 1394년이다. 그런데 류큐에서는 그가 1398년에 임금 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나온다. 4년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또하나 의문점은 1398년 부하 15명을 거느리고 진양(경남 진주)에 머물던 온사도(溫沙道)는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일본측 자료를 뒤져보면 궁금증이 조금 풀린다.

승찰도는 명나라 실록에도 기록된 이름으로, 1380년과 1383, 84, 85년 연이어 명 황제에 조공을 바쳤다. 그는 숙부인 오우에이시(汪英紫)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조선 이성계에게 몸을 의탁했다.

일본측 자료에 산남국 역대국왕 가운데 온사도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승찰도의 류큐어 발음은 오후사토’(うふさと). 온사도는 승찰도의 류큐식 발음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집필자들이 류큐어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우리 발음에 가깝게 변형시킨 것을로 보면 이해가 된다.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측 기록에 나오는 承察度, 조선 기록에 나오는 承察度温沙道가 모두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이쯤되면 실마리가 풀린다.

오키나와가 삼국으로 갈라져 있을 때 승찰도 또는 온사도라는 산남국왕이 숙부와의 권력다툼에서 실각하고 1394년 조선으로 망명했다.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이웃 중산국과 연합해 저항세력을 제압했고, 조선건국 때부터 조공해온 중산국이 나서 산남왕의 귀환을 촉구하게 된다. 조선 이성계는 산남왕을 돌려보내지 않고 보호한다.

승찰도의 숙부는 4년에 걸쳐 저항세력을 진압했고, 전왕파 15명이 1498년에 조선으로 2차로 망명한다. 조선과 류큐 사이에는 계절풍과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한 바닷길이 발달해 있었다. 조선은 산남왕 일행을 따듯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진주에 거주하게 한다. 이성계는 승찰도를 후하게 대접했고, 조정에 불러 조회에 참석하도록 배려했다. 조선에 망명한 산남왕은 13981015일 사망했다.

후임 산남국왕은 승찰도(또는 온사도)가 죽은 1398년부터 자신의 재임기간으로 기록한다. 정권을 찬탈했다는 내용을 숨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만국진량의 종’(萬国津梁の鐘)에 새겨진 명문 /위키피다아
‘만국진량의 종’(萬国津梁の鐘)에 새겨진 명문 /위키피다아

 

류큐는 고려, 조선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오키나와 삼국시대에 중산국이 고려말부터 거래를 시작했으며, 조선조가 개국하던 1392년 중산왕 찰도(察度)가 이성계에게 신하라고 일컫는 글을 바치고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어민 8명을 되돌려 보냈다.

중산국이 1416년 산북왕국을, 1429년 산남왕국을 정복하면서 류큐 통일왕국을 수립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유구국은 40회에 걸쳐 조선에 사절단을 보낸 반면에 조선은 단 3차례 사절단을 유구에 보냈다. 류큐국이 조선보다 적극적으로 교류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성종임금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을 유구국에 선물하기도 했다.

지금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슈리성의 만국진량의 종’(萬国津梁)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류큐국은 남해의 좋은 곳에 있는 나라로, 삼한(三韓, 한국)의 우수함을 모아놓았고, 대명(중국)과 수레바퀴와 같은 관계이며, 일본에게는 순치(이와 입술)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가운데 솟아난 봉래도(낙원)이며, 선박 운항으로 만국의 가교가 되고 있다.”

(琉球国南海勝地にして三韓大明輔車となし日域唇歯となす中間りて湧出する蓬莱島なり舟楫万国津梁となす)

1458년에 제작된 이 종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슈리성이 완전 전소되는 와중에서도 가까스로 보존되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종의 명문은 중국, 일본보다 삼한(한국)을 우선 언급했다. 류큐가 조선 문물의 우수함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산남왕 슬찰도에 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조선왕조실록에 산남왕 슬찰도에 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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