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의 신세계②…그린란드의 개척자
바이킹의 신세계②…그린란드의 개척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3.1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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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머리’ 에릭에 의해 개척…한때 5~6천명 거주했으나 15세기경 철수

 

그린란드의 면적은 215으로 한반도의 10, 대한민국의 20배나 되는 매우 넓은 섬이다. 지리학자들은 호주를 대륙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린란드는 세계 최대의 섬이 되었다. 대륙의 개념으로는 북미 대륙에 속한다.

북극권에 위치해 대부분의 땅이 수천m의 빙하로 덮여있고, 내륙의 연평균 기온이 영하 30°C이므로 사람 살 곳이 못된다. 다만 땅의 1%에 풀밭이 있는데 목축이 가능하다. 2020년 기준으로 인구는 56,000명에 불과하다. 인구의 90%가 이누이트족이다. 덴마크왕국 영토이며,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다.

 

1570년에 그려진 북극해 지도 /위키피디아
1570년에 그려진 북극해 지도 /위키피디아

 

이 섬에 최초로 정착한 유럽인은 바이킹이다. 바이킹에 앞서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이누이트(Innuit)족이 살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가장 먼저 그린란드를 발견한 사람은 울프손(Gunnbjörn Ulfsson)이라고 한다. 울프손은 폭풍에 밀려 그린란드와 북미 대륙까지 보았는데, 그 시기는 870~930년 사이로 추정된다.

 

붉은 머리 에릭 /위키피디아
붉은 머리 에릭 /위키피디아

 

공식적으로 그린란드에 정착한 사람은 붉은 머리에릭(Erik the Red, 950~1003)이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는데, 10살 되었을 때에 아버지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추방되는 바람에 아버지를 따라 아이슬란드로 갔다.

부전자전이라고 했던가. 그도 살인을 저질러 재판에서 3년간 추방명령을 받았다. 982년 에릭이 도착한 곳은 그린란드 최남단인 페어웰곶(Cape Farewell) 근처였다. 그곳은 비교적 따뜻하고 그럭저럭 소와 양을 키우며 살 수 있을 정도의 풀밭도 있었다. 이누이트족들이 근처에서 이글루를 짓고 바다표범이나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3년간 살다가 형기를 마치고 아이슬란드로 돌아갔다.

그는 아이슬란드에서 이민자를 모아 그린란드로 유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유배생활을 하던 곳에 나무가 우거지고 풀밭이 널려 있는 녹색의 대지라고 과장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그린란드’(Greenland). 그 명칭은 실제와 동떨어졌지만, 그의 홍보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아이슬란드에는 경작지가 부족했고, 그곳 정착자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새로운 목초지가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1000년 경에 그린란드 해안을 항해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1000년 경에 그린란드 해안을 항해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985년 그는 25척으로 이뤄진 어마어마한 원정대를 이끌고 그린란드로 항했다. 그의 선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일부는 난파되고, 또다른 일부는 아이슬란드로 되돌아가 최종적으로 그린란드에 도착한 배는 14척이었고, 하선자는 500명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은 아니었다. 이민자들은 생산과 생활에 필요한 도구와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어업과 수렵을 하며 원시적 생활을 이어갔다. 그들은 바다코끼리의 상아, 고래수염, 고래기름, 바다짐승의 가족, 기타 특산물을 아이슬란드에 팔아 필요한 목재와 식량, 공구등을 가져왔다.

에릭은 그린란드 바이킹의 족장이 되었다. 그의 아들 레이프 에릭손(Leif Erikson)은 탐험에 나서 북아메리카를 발견했는데, 에릭은 탐험대에 합류하기 직전에 낙마해 아들의 원정에 가담하지 못했다.

 

1408년에 결혼식이 치러진 기록에 남아 있는 그린란드의 교회 /위키피디아
1408년에 결혼식이 치러진 기록에 남아 있는 그린란드의 교회 /위키피디아

 

그린란드는 척박했지만, 아이슬란드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나마 주인이 없는 땅을 찾아 그린란드로 건너왔다. 그들은 그린란드의 서부와 동부, 중부 세 곳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인구가 많았을 때엔 5~6천명에 육박했다. 인구가 어느 정도 늘어나자 로마 카톨릭은 그린란드에 주교구를 설정하기도 했다.

그린란드는 1261년 노르웨이의 주권을 받아들였고, 1380년에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이 형성되었을 때 그 왕국에 속했다. 이후 연합왕국이 분리된 후 덴마크 왕국령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족들은 15세기에 대부분 철수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소빙기의 도래다. 바이킹족들이 그린란드에 정주를 시작하던 10세기 무렵에 북유럽의 기후는 비교적 온난했지만 13~14세기 이후 소빙기(Little ice age)로 접어 들었다. 날씨가 급강하하면서 북유럽 냉대기후에 적응력이 강한 바이킹족들도 그린란드에 살기 힘들어졌다.

또 전염병이 돌아 수백명씩 죽어 나갔다. 가끔 생계형 해적들이 들이닥쳐 약탈과 살육을 저지르고 도망쳤다. 아프리카에서 상아가 유럽에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주생산품이었던 바다코끼리 상아의 희소성이 떨어졌다.

이외에도 유럽 본국의 지원이 약해졌다. 종주국인 덴마크는 속국인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거래를 축소시켰다. 두 섬의 항해 선박을 연간 1척으로 제한하다보니 식량과 생활용품을 얻지 못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린란드의 생존자들은 점점 야만화되었고, 한대 기후에 적응력이 강한 이누이트만 남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Greenland

Wikipedia, Erik the Red

Wikipedia, Green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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