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방제도①…한주(漢州), 한반도 중심으로 부상
신라의 지방제도①…한주(漢州), 한반도 중심으로 부상
  • 아틀라스
  • 승인 2019.03.1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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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빼앗은 땅…고려, 조선, 대한민국의 수도가 형성된 곳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한후 대동강 이북과 만주 땅을 중국에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땅 가운데 가장 알짜배기 땅을 신라가 얻은 것은 분명하다. 신라가 고구려에게 뺏은 땅에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3개주를 설치했다.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북도, 강원도 땅이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했기에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국경선을 압록강, 두만강으로 밀어 올리는 힘을 얻게 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느냐는 논란을 뒤로 하고, 고구려의 옛땅의 일부를 흡수함으로써 고구려 강역을 회복할 토대를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통일신라의 강역 가운데 고구려에서 뺏은 땅이 절반 이상이다. 통일전 신라와 백제의 땅을 합친 면적보다 넓다. 따라서 신라가 고구려에서 한주, 삭주, 명주의 3개주를 얻었다는 점에서 삼국을 통일했다는 명분을 충분히 갖게 된다.

 

신라가 접수한 고구려 땅 가운데 한주(漢州)는 고려와 조선, 대한민국의 중심지가 된 터전이다.

한주는 충청북도 괴산에서 경기도 서부, 황해도에 이르며, 9주 가운데 가장 넓다.

이 땅의 원주인은 백제였다고 할수 있다. 정확히는 한성백제다. 이 땅을 놓고 처음엔 백제와 고구려가 붙었고, 고구려가 한성백제를 남쪽으로 쫓아내고 차지했다. 신라가 진흥왕때 한강유역을 차지했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황해도 일대로 밀고 올라가 신라의 강토로 만들었다.

 

그래픽=김인영
그래픽=김인영

 

 

신라는 진흥왕 14(553)에 백제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했고, 4년 후인 557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 다시 568년에는 남천주(南川州), 그리고 604(진평왕 26)에는 북한산주로 고쳐졌다가 한산주라고 했다.

통일후 경덕왕 16(757) 12월에 구주의 이름을 모두 고치면서 한주(漢州)로 되었다. 하지만 그뒤에도 한산주의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

한주는 지금 충주에 중원경을 두어 1개 소경(小京)28개군, 46개현을 관장했다. 주가 직할하는 현은 거시현과 황무현인데, 지금의 용인, 이천이다.

주치(州治)는 현재의 광주(廣州)와 경기도 하남시 근처로, 백제의 위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주에 주둔하는 군부대는 남천정(南川停)과 골내근정(骨乃斤停)의 두 군단이었고, 한산주서(漢山州誓만보당(萬步幢)을 두었다. 장관으로 도독(都督), 차관으로 주조(州助, 일명 州輔), 그 밑에 장사(長史, 일명 司馬)를 각각 1인씩 두었다고 한다.

 

한주는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의 자취가 남아 있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세배나 확대한 위대한 정복왕이었다. 그가 정복한 땅의 옛주인은 함경남도 지역의 동옥저, 강원도 영동지방의 예국, 실직, 영서지방의 맥국, 경상남도 대가야등이다.

이로써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정립(鼎立)해 한반도의 주인을 놓고 대결을 벌이기 앞서 세 나라 국경 사이에서 버티며 부족국가를 유지하던 소국들은 거의 모두 신라로 편입됐고, 완충지대의 소국이 흡수되면서 삼국은 국경을 맞대고 밀고 당기는 영토전쟁을 벌이게 됐다.

진흥왕은 새로 영토로 편입한 변경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행정과 민정을 시찰하는 순수(巡狩) 세리머니를 즐겼다.

삼국사기에 진흥왕의 순수 기록이 나온다.

진흥왕 12(551) 3,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 청주)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진흥왕 16(555) 10,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고, 영토의 국경을 정했다. 11,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거쳐 지나온 주군(州郡)의 일 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지방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진흥왕이 즉위 12년째 청주 지방을 순시한 것은 한해 전에 이사부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아 신라의 새로운 영토가 됐음을 선언하기 위한 행사였다. 555년에 이뤄진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삼고, 다음해인 554년에 신주의 군사력을 동원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파한 것을 기념한 행사였다.

진흥왕의 순수 활동은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친정체제 수립을 천명한 이후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는 두 번의 순수 기록만 남겼지만, 마운령, 황초령, 창녕비등이 나중에 발견됨으로써 진흥왕이 함경남도와 경상남도 지역에도 순수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진흥왕은 새로운 확보한 영토를 방문해 주민을 위무하고 행정 체계를 둘러보는 정치적 이벤트를 수시로 했음을 알수 있다.

 

한주의 행정구역은 충청북도, 경기도에 밀집되어 있고, 황해도 지역엔 산발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북쪽을 군사적 경계지역으로 삼고, 남쪽을 주요 거주지로 한 것이다.

지금의 서울은 한양군, 고려의 수도 개성이 이때 개성군으로 편입되었다.

강원도의 철원, 김화가 한주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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