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태국②…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 몽꿋왕
근대 태국②…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 몽꿋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3.2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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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낙 가문 지지로 왕위 계승…영국에 문호개방 후 근대화에 앞장

 

태국 왕실에 관해 가장 대중적으로 소개된 영화가 ‘왕과 나’(King and I)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태국 차크리 왕조의 4대 왕 몽꿋(Mongkut)이다.
라마 4세인 몽꿋 왕(재위, 1851~1868) 시대에 태국은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한다. 많은 서양인이 정부 요로에 고용되었다. 몽꿋 왕 재위 기간에 80여명의 유럽인이 군대 장교, 경찰청장, 세관장, 항만청장 등 공직에 기용되었다. 
몽꿋 왕은 국제어인 영어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왕은 1862년 싱가포르에 체류하던 영국여성 애나 레오노웬스(Anna Leonowens)를 고용해 왕의 자녀와 비빈의 영어 가정교사로 삼았다. 애너는 1967년까지 5년 이상 태국에 머물면서 몽꿋 왕이 외국 통치자들에게 보내는 영문서한을 작성하거나 왕실행사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출판했고, 그 책의 내용을 토대로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헐리웃 영화가 제작된 것이다.

 

몽꿋 왕 /위키피디아
몽꿋 왕 /위키피디아

 

몽꿋 왕은 영화에서처럼 절대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즉위 이전에 27년간 승려 생활을 했었다. 그의 전임 라마 3세는 그의 형이었는데, 라마 3세는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까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차크리 왕조에는 형제승계의 관습이 강했고, 힘센 자가 권력을 잡는 구조였다. 라마 3세의 형제들은 차기 권력을 위해 각축전을 벌였으나, 승려였던 몽꿋은 권력승계 순위에 밀려나 있었다.
그를 왕으로 만들어준 세력은 분낙(Bunnag) 가문이었다. 분낙 가문은 17세기초 아유타야 왕조 시기의 페르시아 상인 셰이크 아흐맛(Sheikh Ahmad)을 시조로 하는데, 종교를 이슬람에서 불교로 바꾼후 태국에 정착하면서 차크리 왕조 등장에 우호세력으로 등장했다. 가문은 정부 각료와 상권을 장악하며 19세기 태국 각 분야를 지배했다.
1851년 라마 3세의 병세가 악화하자 분낙 가문의 수장 딧 분낙은 아무도 거덜떠보지 않던 몽꿋을 차기 왕으로 추천했다. 왕위 계승을 꿈꾸던 왕족들은 분낙 가문의 무력에 제압되거나 몸을 숙였다. 얼떨결에 왕이 된 몽끗은 딧 분낙의 아들들에게 관직을 하사할 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려 경하하는 전례없는 비굴함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몽꿋 왕은 분낙 가문 사람들에게 정부 요직을 내주었다. 딧 분낙의 아들 추앙 분낙은 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했고, 가문 사람들이 재정, 수도행정, 지방관직을 차지했다. 아울러 몽꿋과 경합했던 형제들을 차기 국왕 자리를 맡겨 왕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취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몽꿋은 즉위와 동시에 서양의 도전에 직면했다. 영국은 인도를 손에 넣은 후 미얀마(버마)를 노렸다. 1852~53년에 제2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버마가 패배했다. 버마는 태국에게 늘상 숙적이었다.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공에 멸망했고, 차크리 왕조도 초기에 버마와의 전쟁에 주력했다. 그러던 버마가 무기력해 진 것이 태국에게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더 강력한 서양의 제국이 이웃에 다가와 국경을 맞댄 것이다. 
영국은 또 태국의 영향권에 있던 말레이반도에 개입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메콩강 하류지역을 노렸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에도만에 도착해 개항을 요구했다. 

 

서양 복장을 한 몽꿋 왕 /위키피디아
서양 복장을 한 몽꿋 왕 /위키피디아

 

몽꿋 왕 시기에 태국 대신들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끝까지 문호를 닫고 있다간 버마처럼 무력 공격을 당할수 있다는 것을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태국 관료들은 알고 있었다.
몽꿋 왕은 동아시아를 관할하는 영국의 우두머리가 홍콩 총독임을 파악하고 존 보링(John Bowring) 경에게 서신을 보내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영국은 그동안 태국 정부에 무역 문호를 열 것을 요구하며, 문을 열지 않을 경우 함선으로 짜오프라야 강 하구에 봉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영국군이 서쪽과 남쪽 국경에 바짝 다가온 터에 통상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침공을 막는 길이라 판단한 것이다.
1855년 3월 존 보링 총독이 영국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방콕에 도착했다. 태국측 협상단은 분낙 가문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실무협상은 총리격인 추앙 분낙이 책임졌고, 라마 4세는 협상 결과를 추인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1855년 4월 17일 몽꿋과 보링 사이에 태국-영국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보링 조약(Bowring Treaty)으로 불리는 이 조약은 태국내 영국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영국인이 태국에서 토지를 매입할 권리, 영국 군함이 짜오프라야 강에 진입해 방콕까지 운항할 권리를 부여했다.
결정적인 내용은 태국의 64개 수출품에 대해 3%의 고정관세를 물리도록 한 것이다. 또 영국 상인이 태국에서 자유롭게 거래할수 있도록 했다. 그전까지 태국의 무역은 국가의 독점 무역이었고, 관세는 세입의 큰 원천이었다. 그런데 이 독점거래가 깨지고 관세율도 고정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자 미국, 프랑스, 덴마크,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 구미 각국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태국 정부는 세수 확보라는 큰 과제를 안게 되었다.

 

1822년의 방콕항 /위키피디아
1822년의 방콕항 /위키피디아

 

문호개방후 세수 확보는 상거래의 활성화와 신세원 발굴로 보완되었다. 
시장 개방 이후 태국 항구에 입항하는 서양 무역선과 상인들이 급증했다. 방콕항에 입항한 무역선은 정크를 제외하고 1856년에 141척이었으나 이듬해에 204척으로 늘었고, 그 이후 몇 년간 300~400척에 이르렀다. 선박도 인력과 바람으로 움직이는 정크선에서 증기선으로 현대화되었다. 1860년 태국인이 소유한 증기선이 15척이 되었고, 해안가 조선소는 새로운 증기선을 건조하는 공사로 분주했다. 태국의 무역규모는 몽꿋 왕 즉위 직전인 1850년 560만 바트였으나, 재위 말인 1868년에 1,000만 바트로 두배 가까이 늘어났다.
새로운 세원도 발굴되었다. 라마 3세 때 폐지한 어업세를 부활하고 돼지 등 가금류에 대한 세금도 도입했다. 중국계 화상이 운영하는 도박장, 복권사업, 밀랍, 돗자리, 유흥가, 보트 등 11개 종목에 대해서도 징세했다. 
그렇게 해서 개항 이후 태국 정부의 세입은 연평균 9%씩 늘어나 몽꿋 왕 재위 17년 사이에 세수가 2.2배 증가했다.

태국은 각국 상인의 경쟁시장이 되었다. 그동안 태국인과 중국인 상인만이 활동하던 곳에 미국과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이익을 챙기면서 태국 사회는 다양해 졌다.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경제통화도 증가했다. 무역에선 당시 국제통화였던 스페인 은화가 통용되었다. 멕시코에서 주조된 은화는 태국인들에게 익숙치 않았다. 태국 정부는 멕시코 은화를 녹여 탄환모양의 폿두앙(photduang)으로 변형시켰다. 하지만 못두앙은 빨리 주조될수 없었기 때문에 시장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조정은 1860년 조폐국을 설립해 영국에서 주조기를 도입했다. 이후 납작한 은화를 발행해 유통시켰다. 1863년에는 지폐와 수표도 찍어 유통시켰으나, 상인들은 사용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화폐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그동안 물납으로 세금을 내던 방식이 화폐 납부로 전환되었다. 라마 4세의 정부는 왕국 전체에 화폐를 세금으로 납부토록 했다.

 

탄환모양의 은화 폿두앙 /위키피디아
탄환모양의 은화 폿두앙 /위키피디아

 

몽꿋 왕은 분낙 가문을 비롯해 귀족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과 보다 친화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라마 2세 시대 때만 해도 태국 국왕이 행차할 때 백성들은 바닥에 업드려 용안을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을 들 경우 호위무사가 쏜 화살을 얼굴에 맞아야 했다. 라마 2세는 왕의 행차 시에 백성의 눈을 쏘는 것을 금지시켰고, 라마 3세는 백성이 왕에게 탄원을 올리도록 신문고를 설치했다. 그럼에도 왕과 백성과의 거리는 좁아지지 않았다.
라마 4세는 국왕 행차시 백성이 국왕에게 다가와 쳐다보고 경의를 표시할수 있도록 했다. 또 일주일에 한버씩 백성들의 탄원을 직접 받았다. 몽꿋 왕은 정기적으로 백성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 또 관보를 인쇄해 왕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백성들이 알도록 했다.
라마 4세난 말년인 1866년에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마음대로 파는 것을 금지했다. 당시 태국은 남편, 부모, 주인이 아내와 자식, 노예에 대한 처분권이 있었다. 승려 생활을 오래 한 왕은 인간을 물소 취급하는 제도가 공정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아내와 자식의 동의를 얻어 남편과 부모가 팔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도 비인간적 제도였는데, 당시로는 획기적인 조치였다고 한다.

몽꿋 왕은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국제 천문학계는 라마 4세를 기려 소행성 하나에 몽꿋의 이름(151834 Mongkut)을 붙여 주었다. 그는 천문학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태국이 근대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을 구미각국에 보여주려 했다.
1868년 8월 몽꿋 왕은 개기일식을 관찰하기 위해 방콕에서 남쪽 약 200km되는 후아완으로 행차했다. 이 여행에서 많은 수행원들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도 걸려 10월 1일에 걸려 사망했다. 그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라마 5세는 그의 아들 쭐라롱꼰(Chulalongkorn)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Rattanakosin Kingdom (1782–1932)
Wikipedia, Mongkut
Wikipedia, Bunnag family
조흥국, 근대 태국의 형성, 2013,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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