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태국③…영국 총독이 주무른 전궁사건
근대 태국③…영국 총독이 주무른 전궁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3.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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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낙 가문에 의해 위차이찬 부왕 득세…클라크 총독 개입으로 왕권 회복

 

차크리 왕조의 4대 몽꿋 왕은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1868818일의 개기일식이 나타나기 2년 전에 그 시각을 예측했다. 국왕은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왕족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태양이 지나가는 황도(黃道)의 지점인 후아완으로 행차했다. 영국의 싱가포르 총독도 행사에 초대되었다.

왕은 개기일식을 목격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일식은 646초 동안 진행되었고, 국왕의 예측과는 2초 차이가 났다. 몽꿋의 관측은 당시 프랑스 천문학자의 예측보다 정확했다. 국제천문학계는 이날 일식을 샴 국왕의 일식”(The King of Siam's eclipse)이라고 명명했다. 첨단과학인 천문학 방면에서 태국의 실력이 유럽 제국주의 수준을 능가했음을 과시하는 쾌거였다. 이 사건은 서양인들에게 감히 태국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이 천기를 깨우친 것은 큰 재앙으로 돌아왔다. 그날로 몽꿋은 냉기와 열기를 느끼더니 드디어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쭐라롱꼰도 함께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다.

몽꿋 왕은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임종 전에 총리격이자 귀족의 대표였던 추앙 분낙(Chuang Bunnag)을 불러 아들 쭐라롱꼰을 부탁했다. 아들도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어가는 국왕은 추앙 분낙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아들마저 죽으면 살아남는 왕족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868년 8월 18일 몽꿋 왕이 태국 남부 후아완에서 수행원과 영국인에 둘러싸여 개기일식을 관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868년 8월 18일 몽꿋 왕이 태국 남부 후아완에서 수행원과 영국인에 둘러싸여 개기일식을 관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몽꿋왕은 101일 세상을 떠났다. 아들 쭐라롱꼰은 사경을 헤메다가 회복되었다. 고명대신이 된 추앙 분낙은 15세의 쭐라롱꼰을 국왕으로 모시고 20살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쭐라롱꼰은 그해 11월 라마 5세로 등극했다.

추앙 분낙은 당시 60세의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어린 왕이 나이가 차기 전에 왕권을 분산시키는 일을 꾸몄다. 추앙은 국왕보다 15살 많은 사촌 위차이찬 왕자를 왕위계승권 1위인 부왕(副王, 우빠랏)에 임명한 것이다. 왕실 내부에서 거센 반발이 쏟아졌다. 우빠랏 임명은 국가와 왕실의 중대사로, 국왕이 성년이 된 후에 결정해도 될 터인데 섭정이 미리 정할 사안이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권력을 장악한 분낙 가문의 결정에 대항하지 못했다. 추앙은 가문의 사람들로 정부의 요직을 채웠고, 분낙 가문은 왕실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차크리 왕조의 제5대 국왕 쭐라롱꼰(Chualongkorn, 재위 1868~1910)은 자신의 표현대로 줄기가 잘려져 나간 그루터기처럼 꼭두각시로” 5년간을 보냈다.

 

라마 5세 쭐라롱꼰 국왕 /위키피디아
라마 5세 쭐라롱꼰 국왕 /위키피디아

 

분낙 가문의 지지로 부왕 자리를 꿰어찬 위차이찬은 어린 국왕이 성장하기 전에 힘을 키울 필요성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2,000명으로 늘려 서양식으로 훈련시키고 서양식 무기로 무장시켰다. 부왕은 현대식 증기선 전함도 사들였다. 그의 사병은 왕실의 친위대보다 많았고 무장력도 우세했다. 게다가 국가예산의 3분의1을 전용하며 세력을 늘려 나갔다.

위차이찬 부왕은 실력자 추앙 분낙의 지지를 얻고 있는데다 영국 총영사 토머스 녹스(Thomas George Knox)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였다. 녹스는 무관 시절에 위차이찬 가문의 군사고문 일을 했기 때문에 개인적 유대감이 강했다.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엔 두명의 군주가 없는 법이다. 국왕과 부왕의 관계에 상명하복의 질서가 무너지면 내란이 일어나 소지가 크다. 어린 국왕은 성년이 되면서 자신보다 더 강력한 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1973920일로 쭐라롱꼰은 만 20세가 되었고, 추앙 분낙은 섭정에서 물러났다. 쭐라롱꼰은 친정(親政) 체제를 드러내기 위해 그해 말 두 번째 즉위식을 거행했다.

 

방콕의 전궁(1890년) /위키피디아
방콕의 전궁(1890년) /위키피디아

 

부왕(우빠랏)은 왕궁과는 별도의 궁전에 사는데 이를 전궁(前宮, Front Palace, Wang Na)이라 불렀다. 두 왕궁의 대립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터지고 말았다.

18741228일 밤, 태국 왕궁의 가스저장고에 작은 폭발이 일어나 불길이 순식간에 인근의 왕실 사원 왓 프라캐우로 확산되었다. 왕실 규정에 왕궁에 사고가 나면 전궁의 병력이 의무적으로 투입되도록 되어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전궁의 병력은 불을 끄러 왕궁에 왔는데 전원이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불을 끄러 온 병력이 무장을 한 것은 이해할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다행히 전궁 병력이 도착했을 땐 불을 끈 상태였다. 국왕의 친위대는 왕궁 문을 지키며 의심스러운 전궁 병력의 진입을 차단했다.

쭐라롱꼰은 불이 나고 병력이 투입되는 이 모든 사태가 부왕의 계략으로 판단했다. 국왕은 친위대에 전궁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라마 5세는 동조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섭정이었던 추앙 분낙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지방에 내려가 있던 추앙은 이 기회에 국왕과 부왕의 대립을 중재하면서 세를 과시하려 했다.

66세의 노련한 정치꾼은 세 사람에게 각기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라마 5세에겐 위차이찬의 부왕 지위를 박탈하되, 전궁의 대우만 살리는 내용의 중재인을 제시했다. 또 영국 공사관엔 영국인 보호를 위해 전함을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위차이찬에겐 국왕이 당신을 처형하고자 하니, 내가 제시한 중재안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위차이찬은 추앙 분낙의 중재안을 거부했다. 차기 국왕이 될 권한을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위차이찬의 다음 선택은 졸렬했다. 해를 넘겨 197512일 새벽, 그는 영국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그때 총영사 녹스는 본국에 가 있었고, 대리영사 뉴먼(Newman)이 총영사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왼쪽부터 위차이찬, 추앙 분낙, 앤드루 클라크 /위키피디아
왼쪽부터 위차이찬, 추앙 분낙, 앤드루 클라크 /위키피디아

 

궁정 암투에서 출발한 분란은 국제무대로 옮겨졌다. 국왕을 지지하는 국가평의회는 외국 대사관으로 도피한 부왕을 비난했다. 쫄라롱꼰은 추앙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위차이찬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부왕직을 박탈했다. 국왕은 영국 영사관에 부왕을 내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위차이찬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했다. 뉴먼 대리영사도 위차이찬의 입장을 지지했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뉴먼 대리영사는 상급자인 싱가포르 총독 앤드루 클라크 경(Sir Andrew Clarke)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클라크 경운 본국에 답변을 요청했다. 런던 정부는 클라크 경에게 방콕에 가서 중재할 것을 시달했다.

1875218일 클라크 총독은 7천톤급 프리깃함에 알프레드 라이더 제독을 대동하고 방콕항에 입항했다. 뉴먼 대리영사가 전함에 올라 위차이찬 부왕에 유리한 입장에서 상황 전개과정을 브리핑했다. 하지만 클라크는 쫄라롱꼰 국왕에 동정적이었다. 클라크는 2년전 두 번째 즉위식에서 국왕을 알현했는데, 국왕의 개혁의지에 감명받았다. 쫄라롱꼰은 신하들이 국왕 앞에서 엎드려 기는 것부터 바꾸고 각종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편하겠다고 설명했고, 그 설명이 클라크의 마음을 움직였다.

클라크 총독은 라마 5세를 알현했다. 3시간 동안의 환담을 마치고 총독은 국왕에게 영국은 태국 내정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국왕이 마음껏 통치하십시오.”라고 대답하고 나왔다.

영국 총독이 내정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국왕을 지지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또다른 내정간섭이었다. 클라크는 70살 가까이 된 추앙 분낙을 함대로 불러 왕실에 더 이상 내분을 일으키지 말 것이며, 왕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일장훈시를 하고 돌려보냈다. 그는 미국, 프랑스 등 방콕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들을 초빙해 대영제국과 함께 태국 왕실을 지지하자고 설득했다.

영국에 의지해 반전을 노렸던 위차이찬은 크게 낙담했다. 그는 하는수 없이 추앙 분낙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위차이찬은 쭐라롱꼰 국왕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냈고, 쭐라롱꼰은 용서의 마음으로 대답했다.

이로써 왕실의 분쟁은 정리되었다. 위차이찬은 부왕 지위를 박탈당했고, 사병도 경무장 병력 200명으로 줄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전함 등은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그에게 집중되었던 예산은 국고로 귀속되었다. 위차이찬은 아무런 권한 없이 무기력하게 살다가 1885년에 사망했는데, 그가 죽고 전궁 제도는 폐기되었다.

전궁 사건 이후 분낙 가문의 위세도 꺾이고 쭐라롱꼰 왕의 형제들이 정부 요소를 장악하게 .되었다. 쭐라롱꼰 왕은 이후 태국의 근대화와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쫄라롱꼰은 이 사건에서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저항을 경험함으로써 급격한 개혁을 피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Chulalongkorn

Wikipedia, Front Palace Crisis

Wikipedia, Somdet Chaophraya Sri Suriwongse

Wikipedia, Solar eclipse of August 18, 1868

조흥국, 근대 태국의 형성, 2013,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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