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태국④…국토의 절반을 잃고 지킨 독립
근대 태국④…국토의 절반을 잃고 지킨 독립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3.3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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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에 사방의 영토 빼앗겨…두 제국의 완충국으로 주권 유지

 

태국의 옛 이름은 샴(Siam)이다. 샴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초까지 여러 차례 제국주의의 식민화 위협을 겪었다. 그럼에도 샴은 무력이 판을 치는 제국주의 시대를 관통하며 아시아에서 드믈게 독립을 유지했다. 바람이 불 때 몸을 굽힐줄 아는 대나무와 같은 외교를 실행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고, 영국과 프랑스가 완충국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첫 번째 위기는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영국의 압박을 받아들여 1855년 불평등한 보링 조약을 체결했을 때다. 두 번째 위협은 1863년 프랑스에게 속국이었던 캄보디아를 내주었을 때다. 세 번째로 1893년엔 또다른 속국 라오스를 프랑스에 뺏겼다.

영국과 프랑스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경쟁적으로 태국을 조였고, 마침내 태국 증심부를 놓고 대치하게 되었다. 마주 보고 달리던 두 기관차는 18961월 마침내 태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는다. 두 열강은 합의에도 불구하고 20세기초에 말레이반도와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태국 땅을 조금 더 떼어먹었다.

 

19세기 이후 샴의 영토축소 /위키피디아
19세기 이후 샴의 영토축소 /위키피디아

 

캄보디아는 19세기초에 태국과 베트남의 이중 속국이었다. 1860년 두앙 국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노로돔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얼마후 동생 위타에게 빼앗겼고, 위타도 1862년엔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또다른 형제 사소왓에게 쫓겨났다.

태국의 라마 4(몽꿋)는 군대를 파견해 사소왓을 밀어내고 노로돔을 왕위에 복귀시켰다. 태국의 일방적인 행위에 프랑스가 항의했다. 프랑스는 1862년에 베트남과 사이공 조약을 체결해 메콩강 하류에 코친차이나 식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들어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종주권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무력을 동원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18637월 프랑스는 노로돔에게 프랑스의 보호령을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 수락을 얻어냈다. 이에 앞서 태국 정부도 노로돔에게 보호권을 갖는다는 비밀조약을 체결했다. 이 사실이 영국 식민지였던 싱가포르의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방콕에 외교사절단을 보내 캄보디아를 단독 지배할 계획이므로, 태국의 보호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태국이 포기하지 않으면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몽꿋 왕은 대나무 외교전술을 썼다. 프랑스에 무력으로 짓밟힐 바에야 속국을 떼내 주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63년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에 비해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강하게 집착했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에 이어 1883년에 베트남 전체를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이듬해인 1884, 보호령이었던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전환시켜 직접 통치했다. 이제 프랑스는 태국의 속국이었던 라오스로 눈을 돌렸다.

그 시기에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이슬람 왕국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태국의 숙적인 버마와 전쟁을 벌여 1886년 버마 전체를 영국령 인도와 합병했다. 그동안 태국을 괴롭혀 왔던 베트남의 자리엔 프랑스가, 버마(미얀마)엔 영국이 도사리면서 집게발처럼 조여왔다.

 

오귀스트 파비 /위키피디아
오귀스트 파비 /위키피디아

 

라오스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화 작업은 오귀스트 파비(Auguste Pavie, 1847~1925)라는 인물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파비는 프랑스 브레타뉴 출신의 시골뜨기로 어려서 생계를 위해 인도차이나로 건너갔다. 몸은 허약했지만 상황 판단력이 빨랐고 정확했다. 그는 군대에 복무한 후에 캄보디아 캄포트 항구에서 수십년 동안 우편일에 종사했다. 파비는 토착인들의 생활과 언어를 배우며 현지화했다. 1879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 샤를 드 빌러가 파비의 재주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인도차이나 탐험의 임무를 맡겼다.

파비는 10여년 동안 인도차이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프랑스 제국주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했다. 그는 영국이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식민화한 것에 경쟁해 프랑스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당국자는 1886년에 아무런 외교 경험이 없는 파비에게 부영사라는 타이틀을 주고 라오스 루앙푸라방(Luang Prabang)에 파견했다. 파비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태국에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 제국주의 앞잡이의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태국 정부는 단박에 거절했다. 프랑스가 제국주의 시절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한 일을 들여다 보면 그들이 문화인인양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를 깨닫게 한다.

태평천국의 난(1850~1864) 기간에 중국 윈난 지역에서 궐기한 이슬람 교도인 회족(回族) 반란군이 정부군의 진압에 쫓겨 라오스로 밀려 왔다. 회족은 베트남 통킹만에서 라오스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당국은 회족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1888년에 캄보디아에 병력을 투입했다가 철수하지 않고 눌러 앉혀 버렸다. 프랑스는 라오스를 식민화할 의도를 노골화했다.

 

1892년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파비를 방콕 주재 영사로 발령했다. 파비는 태국에 라오스를 주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할 것임을 경고했다. 태국 지도부는 프랑스의 무리한 요구를 영국이 막아줄 것으로 믿고 라오스에 병력을 증강시켰다.

18934월 프랑스는 라오스에 3개 부대를 파병했다. 태국군은 매복 작전을 펼쳐 프랑스 정찰병을 사살했다. 프랑스는 일방적으로 남의 영토를 침공하고선 사상자에 대한 배상을 태국 정부에 요구했다.

그해 7월 프랑스는 2척의 전함을 타이 만에 파견해 방콕의 관문인 차오프라야 강 하구를 봉쇄했다.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전함 3척을 파견했다. 태국의 쫄라롱꼰 왕은 영국이 프랑스 해군의 진입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713일 방콕 빡남 항을 지키던 수비병이 프랑스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 프랑스 전함은 즉각 응사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영국 전함은 멀찌기서 바라볼 뿐 프랑스 전함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 함대의 포는 방콕 왕궁을 정조준하고 720일까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함포 사격을 할 것임을 경고했다. 조건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땅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그동안의 프랑스인 사상자에 대한 배상금 300만 프랑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기다가 프랑스인 살해를 저지른 군인들을 처벌할 것도 요구했다. 이 작전의 전부를 파비가 주도했다.

쭐라롱꼰 왕은 영국이 조금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말았다. 국왕은 라오스를 프랑스에 떼어주고 배상금도 갚겠다고 했다. 1893103일 프랑스-샴 조약이 체결되고, 분쟁은 해결되었다. 태국의 일방적 패배였다. 이 사건으로 쫄라롱꼰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893년 7월 13일 방콕 외항 빡남을 포격하고 있는 프랑스 전함 /위키피디아
1893년 7월 13일 방콕 외항 빡남을 포격하고 있는 프랑스 전함 /위키피디아

 

프랑스가 캄보디아에 이어 라오스도 먹어치우자, 태국 왕실은 이제 본토마저 공격당할 것이란 깊은 우려에 사로잡혔다. 영국도 프랑스의 서진에 당황했다. 이후 런던과 파리의 외교가는 인도차이나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상을 벌였고, 18961월에 태국을 완충국(buffer state)으로 삼기로 합의하게 된다. 이 약속에 의해 태국은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20세기 들어서도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식민영토를 잠식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메콩강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영국은 1909년에 태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해 말레이반도의 크다, 프롤리스, 클란탄, 트렝가누를 할양받았다.

태국은 19세기 이후 전성기의 절반에 가까운 456.000의 땅을 잃었다. 한반도의 두배 이상이다. 독립의 댓가는 컸다.

 


<참고자료>

Wikipedia, Rattanakosin Kingdom (17821932)

Wikipedia, Chulalongkorn

Wikipedia, Franco-Siamese War

Wikipedia, Anglo-Siamese Treaty of 1909

조흥국, 근대 태국의 형성, 2013,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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