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태국⑥…입헌군주제의 출발, 1932 혁명
근대 태국⑥…입헌군주제의 출발, 1932 혁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4.0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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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학파 중심으로 혁명세력 결집…800년 지속된 절대군주제 종식

 

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하나씩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막내 쁘라차티뽁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쁘라차티뽁에게로 넘어갔다.

192511월 쁘라차티뽁(Prajadhipok)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로 즉위했을 때 나라는 거덜나 있었다. 재정은 파산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어쩌다 왕이 된 쁘라차티뽁 왕은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버거웠다. 능력도 없었거니와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기관으로 최고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파누랑시 등 형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낏띠야곤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졌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군주제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끼지 못했다. 라마4·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줄 알았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꿨다.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뭘 해도 대중은 시큰둥했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서양물을 먹은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앙시앙레짐에 불과했다.

 

라마 7세 쁘라차티뽁 왕 /위키피디아
라마 7세 쁘라차티뽁 왕 /위키피디아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구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선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사회의 민주적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태국 유삭생은 영국에 301, 미국에 47,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세력의 자제여서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롸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쁘리디 바놈용(왼쪽)과 쁠랙 피분송크람(오른쪽) /위키피디아
쁘리디 바놈용(왼쪽)과 쁠랙 피분송크람(오른쪽) /위키피디아

 

1927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이 자리를 함께 했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쁘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쁘라윤 파몬몬뜨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샴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놀랍게도 그들의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같았다. 결론으로 7인의 멤버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랏사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번역하면 인민당이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샴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해 세수가 감소했다. 국방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수 없었고, 91명의 장교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포기하자 기축통화였던 파운드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제도를 포기했다. 정부 지출을 3분의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동안 물리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해고 되었다. 경제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팍팍해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다던 우리 왕은 지금 무얼 하시나요라고…….

1932년은 라따나꼬신 왕조수립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 멸망설이 나돌았다. 왕조가 창건된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닥쳐 왕조가 끊어진다는 소문이었다. 태국 사회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다.

 

1932년 6월 24일 성명서를 읽는 혁명지도부 /위키피디아
1932년 6월 24일 성명서를 읽는 혁명지도부 /위키피디아

 

귀국한 인민당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혀명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쁘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송크람은 군부내 급진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쫒겨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1931년 후반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독일에서 유학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음모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6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쁘라차티뽁 왕은 방콕을 떠나 말레이반도 후아힌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겼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 왕자가 맡고 있었다.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파리밧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뤘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1932년 방콕 거리를 점령한 쿠데타군 /위키피디아
1932년 방콕 거리를 점령한 쿠데타군 /위키피디아

 

6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쁘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세력은 쁘라차티뽁 왕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쁘라차티뽁 왕은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쿠데타 소식을 듣고 쁘라차티뽁은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쁘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을 주무르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쁘라차티뽁은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간 이어온 절대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샴 혁명( 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피릃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이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ailand (19321973)

Wikipedia, Siamese revolution of 1932

Wikipedia, Rattanakosin Kingdom (17821932)

Wikipedia, Prajadhipok

조흥국, 근대 태국의 형성, 2013,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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