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섬에서 제주 되찾은 사연 읽는다
범섬에서 제주 되찾은 사연 읽는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4.0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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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키우던 몽골족의 반란…공민왕, 최영 장군 보내 100년만에 제주도 탈환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동 앞바다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생긴 범섬이 있다. 호도(虎島)라고 불리는 이 섬에는 해식 쌍굴이 뚫려있는데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울 때 뻗은 두발이 뚫어 놓았다는 전설이 내려 온다. 사람이 살지 않은 이 무인도는 고려말 공민왕 23(1374)에 반란을 일으킨 목호들이 저항하다 최영 장군의 토벌에 쫓겨 도망갔다가 전멸한 내력의 섬이기도 하다.

목호(牧胡)는 목장을 관리하는 오랑캐, 즉 고려시대에 원()나라가 제주도 목장에 말을 키우며 파견한 몽골족 관리를 말한다. 목호들은 제주도에서 말을 사육해 원나라로 공급했는데, 중국에 명()나라가 일어나 제주도 말을 달라 하니, 몽골족 목호들이 이에 반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고려 조정은 최영 장군을 제주에 파견해 반란자들을 진압했다.

 

공중에서 촬영한 서귀포 앞바다의 법섬 /제주도 홈페이지
공중에서 촬영한 서귀포 앞바다의 법섬 /제주도 홈페이지

 

원의 탐라목장은 삼별초의 반란에서 출발한다. 1273년 고려 원종 14(1273) 여몽 연합군은 제주도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이는 김통정의 삼별초군을 진압하고, 제주를 탐라로 환원시키고 고려로부터 분리, 직할 체제로 전환했다. 이때부터 목호의 난까지 100여년간 제주도는 몽골의 땅이었다.

몽골은 탐라를 일본과 남송을 공격하는 전진기지이자, 배후에서 고려를 견제하는 지렛대로 활용했다. 원 세조(쿠빌라이)12768월 탐라 다루가치로 임명된 타라치(塔刺赤)에게 말 160필과 이를 관리할 하치(哈赤)들을 보내 목장을 운영하도록 했다. 이것이 탐라 목장의 시초다. 제주도는 초지가 풍부하고 말을 위협하는 맹수가 없으며, 기온이 온화해 4계절 내내 말을 방목할수 자연환경이 구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남송과 왜를 영결하는 해양 루트의 중간지점에 위치했다.

몽골은 제주에 동아이막(aimaq, 阿幕)과 서아이막 등 두 곳의 목장을 설치했다. 동아이막은 지금의 성산읍 수산2(수산평) 일대이고, 서아이막은 한경면 고산리(차귀평)으로 비정된다. 탐라목장은 고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던 치외법권 지역이며, 원제국이 자랑하는 14개 황실목장의 하나였다. 원제국은 탐라 지배기에 수시로 말을 가져가 제국 유지에 활용했다.

 

제주 서귀포시 법환마을 해변의 최영장군승전비 /박차영
제주 서귀포시 법환마을 해변의 최영장군승전비 /박차영

 

그러다가 1300년대 말에 중국에 한족들이 일어나 명나라를 건국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추구하며 원나라에 저항했다. 고려가 제주도를 영토로 되돌리기 위해 제주목사와 만호등을 파견하자, 몽골계 하치(목호)들은 고려 파견관들을 죽이며 저항했다. 목호의 난은 1356년부터 1376년까지 20년 동안 5회에 걸쳐 발생했다. 이 기운데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시데리비스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샤오쿠투부카))1362년과 1374년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제주 서귀포시 법환마을 막숙. 멀리 범섬이 보인다. /박차영
제주 서귀포시 법환마을 막숙. 멀리 범섬이 보인다. /박차영

 

13747월 명이 고려에 탐라 말 2,000필을 요구하자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이 원 세조(쿠빌라이)께서 기른 말을 어찌 명에 헌납할 수 있겠느냐고 항의하며 난을 일으켰다. (고려사 712)

공민왕은 최영(崔瑩) 장군을 삼도도통사로 삼아 반란세력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최영은 전함 314척과 사졸 25천명을 이끌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엄청난 대군이 투입된 것이다. 목호의 병력은 기병 3천명으로 적지 않은 수였다.

최영의 고려군은 명월포, 명월촌(한림읍 명월리), 어름비(애월읍 어음리), 밝은오름, 검은데기오름, 새별오름, 연래(서귀포시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홍 동홍)등에서 목호군을 토벌했다.

쫓기던 목호는 마지막으로 범섬으로 도주했다. 고려사(열전 최영전)에는 이렇게 서술한다.

적의 괴수가 도망하여 산 남쪽의 호도(虎島)로 들어갔다. 최영이 정룡을 보내어 날랜 전함 40척을 거느리고 그들을 포위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뒤따라갔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가 처자와 그의 일당 수십 명을 거느리고 나왔으나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벼랑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공중에서 촬영한 서귀포 앞바다의 법섬 /제주도 홈페이지
공중에서 촬영한 서귀포 앞바다의 법섬 /제주도 홈페이지

 

범섬 건너편 법환마을 해변에는 최영장군승전비가 우뚝 서 있다. 목호들이 범섬에 웅거해 항거한지 10여일만에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법환동의 또다른 해안에는 용천수가 솟아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막숙이다. 목호 반란군은 이 곳에서 범섬으로 도망쳤고, 최영장군도 이 포구에 막사를 짓고 목호잔당을 섬멸한 곳이라 하여, 막숙이라 한다.

목호의 난을 진압한 후 고려는 몽골에게 빼앗겼던 제주도를 되찾았다.

 


<참고자료>

강만익, 고려말 탐라목장의 운영과 영향, 2016, 한몽국제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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