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태국⑦…내란, 그리고 파시즘
근대 태국⑦…내란, 그리고 파시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4.05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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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당파 반란 진압후 라마 7세 퇴위…유럽 파시즘 추수하며 민족주의 강화

 

1932624일 새벽, 인민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후아힌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던 쁘라차티뽁 왕(라마 7)은 혁명세력을 무력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죠아지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론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다. 문맹율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릴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꼰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후 그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 다음해인 1933, 급진파였던 쁘리디 바놈용이 개혁안을 쁘라차티뽁 왕에게 제출했다. 쁘리디 개혁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꼰 총리도 개혁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꼰 정부는 보수세력을 결집해 개혁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쁘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송크람과 쁘리디의 연합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왕당파 반란지역 /위키피디아
왕당파 반란지역 /위키피디아

 

혁명세력 내부에 개혁안을 놓고 내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왕당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몽꿋왕의 손자인 보워라뎃 왕자는 193310월 군부내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혁명정부가 국왕을 격하하고 공산주의를 도모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혁명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절대왕정 시절에 국방장관을 역임한 보워라뎃은 전국의 장교들이 쿠데타에 동조할 것을 요구했지만 방콕 주변의 육군부대는 혁명 세력을 지지했다. 해군은 중립을 선언했다.

국왕은 혁명정부와 왕당파 반란자 사이에 선택을 강요받았다. 쁘라차티뽁 왕은 콕 찝어 중립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애매하게 대응했다. 국왕 부부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반도로 도피해 버렸다. 이긴 쪽에 붙겠다는 양다리 전략이었다. 왕당파 반란은 실패로 귀결되었고, 보워라뎃을 비롯해 반란자들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국왕의 입장이 난처해 졌다. 혁명파들은 왕당파 반란 때 국왕이 자신들을 지지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실과 정부의 알력이 심화되었다. 파혼 정부는 왕당파를 탄압하면서 왕실에 대한 규제도 강화했다. 국왕은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옛 신하들의 시퍼런 눈초리에 무기력감을 느꼈다. 신하들은 국왕도 법을 따라야 합니다고 했다. 얼마전까지 고개를 들지도 못하던 자들이 뻗뻗하게 대들었다.

쁘라차티뽁 국왕은 병을 핑계로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아직도 국왕에게 남아 있는 법률안 거부권을 활용하며 왕권을 지키려고 했다. 그는 왕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했다. 19341014일 그는 정부에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퇴위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파혼 정부는 왕의 요구를 묵살했다.

193532일 라마 7세이자 쁘라차티뽁 왕은 퇴위를 선언했다. 그는 퇴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과거에 신민에게 행사하던 모든 권한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권한을 신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권위적으로 사용하는 개인 또는 집단에 양도할 생각이 없다.”

혁명세력을 비난하는 발언이었다. 파혼 정부는 국왕의 퇴임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도록 언론을 통제했다.

 

1934년 독일을 방문, 아돌프 히틀러의 영접을 받고 있는 태국 라마 7세. /위키피디아
1934년 독일을 방문, 아돌프 히틀러의 영접을 받고 있는 태국 라마 7세. /위키피디아

 

쁘라차티뽁은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말을 잘듣는 만만한 왕족을 찾았다. 쁘라차티뽁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나이는 9살이었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빼면 19466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쁘라차티뽁 왕을 쫓아낸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쁘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쁘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국민도 지원할수 있는 탐마삿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쁠랙 피분송크람 /위키피디아
쁠랙 피분송크람 /위키피디아

 

193812월 또다시 정치권에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유지해온 정치적 동맹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명을 체포하고 그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샴(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꿨다. 샴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나라라는 국수주의적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피분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인종을 배척했는데, 타깃은 화교였다. 중국인 상인계층에 대한 선동적 구호를 쏟아냈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의 문을 닫게 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조하는 포스터 /위키피디아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조하는 포스터 /위키피디아

 

피분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선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웃통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송크람은 독재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손잡는 프레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ailand (19321973)

Wikipedia, Thailand in World War II

Wikipedia, Thai cultural mand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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