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태국⑧…친일에서 친미로 빠르게 전환
근대 태국⑧…친일에서 친미로 빠르게 전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4.0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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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분과 쁘리디의 협력과 경쟁 관계…쿠데타와 민주화 운동의 연속

 

1932년 샴 혁명의 주역은 쁠랙 피분송크람과 쁘리디 바놈용이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협력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1938년 피분송크람(약칭 피분)이 총리가 되었다. 그는 극우보수주의자로 나라 이름을 샴(Siam)에서 태국(Thailand)로 바꾸고, 국민을 상대로 정신개조운동을 벌였다. 피분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다. 이에 비해 쁘리디는 화교 후손으로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

1939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둘 사이의 견해차가 벌어졌다. 쁘리디는 태국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6월 프랑스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되고 비시 정부가 들어서자 피분은 지금이야말로 프랑스에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할 때라고 판단했다. 피분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면 일본과 손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19406월 태국과 일본은 도쿄에서 상호우호조약을 체결했다.

피분 총리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기 위해 참모총장을 겸임하고, 프랑스에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영토를 내놓으라고 통보했다. 비시 정부는 거절했다. 그러자 19409월 피분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태국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지상전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해전에서 프랑스에 참패를 당했다. 일본이 프랑스와 태국 사이에 중재를 자청했다. 19411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일부 영토를 태국에 떼어주는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태국은 일본 덕분에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

 

쁠랙 피분송크람과 쁘리디 바놈용 /위키피디아
쁠랙 피분송크람과 쁘리디 바놈용 /위키피디아

 

194112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동시에 동남아시아를 공격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태국이 자기네편에 설 것으로 믿었다. 일본이 비시 정부를 설득해 영토 회복을 도와주었으니, 당연히 태국이 자기네를 지지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피분 총리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고 정적인 쁘리디를 내각에 끌어들여 전쟁 중립을 추진했다. 태국 정부가 중립 노선을 밝히자, 일본은 피분 정부에 시한부로 조건 수락을 요구했다. 일본의 조건은 버마, 말레이시아 등 영국 식민지를 공격할 터이니, 태국은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를 침공할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일본은 128일까지 답변하지 않을 경우 침공하겠다고 했다. 127일 밤 11시 일본군은 이동을 시작해 8일 태국을 침공했다.

 

2차 대전 때 태국이 회복한 영토 /위키피디아
2차 대전 때 태국이 회복한 영토 /위키피디아

 

당시 일본은 파죽지세였다. 중일 전쟁에서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태평양의 미국령 진주만을 공격했으며,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에 진주했다. 피분 총리는 비겁하게도 일본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길만 열어 주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할 것으로 믿었다.

19411221, 피분 총리는 방콕 왓프라깨우 궁전에서 일본과 동맹해서 연합군에 대항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태국은 주축국의 일원으로,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태국 내 모든 군사시설과 철도, 도로를 일본이 이용할수 있도록 허용했다. 태국의 선전포고에 미국, 영국과 프랑스, 중국은 물론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연합국은 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2차 대전 때 태국이 영국에서 회복한 말레이반도 영토 /위키피디아
2차 대전 때 태국이 영국에서 회복한 말레이반도 영토 /위키피디아

 

쁘리디는 일본을 싫어했다. 피분은 일본에 붙는 바람에 쁘리디를 아무런 권한이 없는 섭정 자리로 밀어 냈다.

일본에 골북한 피분 정권의 태국은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이나 다름 없었다. 만주국보다는 자율성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형태였다고 규정된다.

태국은 병력을 동원해 버마, 말레이시아 전선에 참전해 영국군, 미군과 싸웠다. 덕분에 태국은 버마와 말레이시아, 라오스에서 영토를 넓혔다. 일본에 부역한 댓가였다. 연합군은 그 반격으로 방콕 시내를 대대적으로 공습했다.

이 무렵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동원해 버마와 태국 국경을 흐르는 콰이 강에 다리를 건설했는데,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라는 영화는 이 때의 스토리다.

 

2차 대전 때 태국이 주장한 미얀마내 영토  /위키피디아
2차 대전 때 태국이 주장한 미얀마내 영토 /위키피디아

 

일본군이 태국에서 점령군인양 행동을 하면서 태국인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태국 양민이 일본군에 살해되는 사건들이 빚어졌는데, 피분 정부는 그럭저럭 일본과 타협하며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1943년경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주축국이었던 이탈리아가 패망하고,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이 섬들을 하나씩 점령하며 일본 열도를 향했다. 버마 전선에서 영국과 일본의 전투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피분 정부는 일본과 거리감을 두었다. 이러다가 일본과 함께 연합군에 점령되는 게 아닌지를 걱정했다. 태국에서는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바돌리오(Pietro Badoglio)가 모델로 떠올렸다. 바돌리오는 무솔리니가 실각한 이후 총리가 되어 연합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인물이다.

이때 나선 사람이 피분의 정적 쁘리디 바놈용이다. 쁘리디는 반일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연합군의 편에 섰다. 그리고 미국에게 피분 정부가 어쩔수 없이 일본의 편에 섰다고 해명했다. 영국은 태국에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프리디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일 게릴라들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프리디의 반군 세력은 5만명을 헤아렸다.

19441월 쁘리디 세력은 피분 정권을 무너뜨렸다. 새 정권은 19448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5, 태국 정부는 일본군을 기습공격했다. 반정부 게릴라 부대는 정규군에 합세해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일본이 패망하자 태국은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 내의 친일파를 제거했다. 그리고 자유태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하고 일본에 기대어 얻은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의 영토를 돌려주었다. 덕분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패전국 대우를 면했고, 194612월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태국이 빠르게 친미국가로 전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쁘리디는 19463월에 총리가 되었다. 그가 총리를 맡은지 3개월 되던 194669, 오랫동안 해외생활을 하던 아난타 국왕이 귀국해 침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엔 숱한 의문을 남겼다. 정적들은 쁘리디가 국왕 사망의 배후인물이라는 근거없는 소문을 퍼트렸다. 쁘리디는 소문의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8월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아난타 국왕이 사망한 후 그의 동생인 푸미폰이 라마 9세로 등극한다.

쁘리디가 물러난 후 태국 정정은 혼미를 거듭했다. 194711월 피분의 부하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19484월 피분은 군부의 지지로 다시 총리가 되었다. 한때 칠일파였던 피분은 이제 친미파로 돌변했다. 1950년에 한국전이 터지자 피분 정권은 과거 친일파의 원죄를 싯으려 유엔 결의에 따라 즉시 파병했다.

또 한때 파시스트였던 피분은 언제 그랬냐는둥 정치·사회의 여러분야를 민주적으로 돌려 놓았다. 피분의 이런 변신에 쁘리디의 추종자들은 정권 전복을 여러차례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쁘리디는 1949년 중국으로 도피했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198382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피분은 두 차례에 걸쳐 태국 역사상 무려 151개월의 최장수 총리를 지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부하의 쿠데타로 1957년에 물러났다. 피분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은 2차 대전 때 도와준 그를 거두어 들였다. 1964년 피분은 일본 가나자와현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분과 쁘리디의 갈등은 오늘날에도 태국 사회에 장면을 바꾸어 연속되고 있다. 피분은 쿠데타의 원조라는 오명을 안고 있고, 쁘리디의 추종자들은 민주화와 반군주제의 기치를 이어가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History of Thailand (19321973)

Wikipedia, Thailand in World War II

Wikipedia, Franco-Thai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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