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철의 표해록엔 하룻밤 로맨스도 적었다
장한철의 표해록엔 하룻밤 로맨스도 적었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4.10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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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무인도에 표착, 베트남 상선에 구조…지리서·문학서로 가치

 

제주 애월읍 한담해변은 카페거리로 유명하다.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해안 경사면에는 커피점이 즐비하다.

해변을 내려오면 제주 전통의 초가집이 나오는데, ‘장한철 생가. 장한철이 누구이길래, 그의 집까지 보존하는 것일까.

장한철은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학문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은 아니다. 그저 조선시대 평범한 선비였을 뿐이다.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쓴 표해록’(漂海錄)의 작품성이 뛰어나 후대 학계의 관심을 끌면서부터였다.

 

제주도 애월읍 해변의 장한철 생가 /박차영
제주도 애월읍 해변의 장한철 생가 /박차영

 

장한철(張漢喆)1744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나 영조 재위시기인 17701225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는 장삿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그가 탄 배는 류큐(琉球, 오키나와) 열도의 여러 섬 가운데 호산도(虎山島)라는 무인도에 표착했다. 해를 넘겨 17711월 다행스럽게 근처를 지나던 베트남(安南) 상선을 만나 흑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으나, 다시 풍랑을 만나 청산도(靑山島)에 표착해 살아 남았다.

그후 그는 잊혀졌다. 그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61년 국문학자 정병욱에 의해 그의 표해록에 소개되면서부터였다. 1980년대에 장한철의 표해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고, 주로 문학계에서 기행문학·서사문학·해양문학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었다. 아울러 장한철의 표해록은 당시의 해로와 해류(海流), 계절풍 등에 관한 해양 지리서로서 문헌적 가치가 높다. 제주도의 삼성(三姓)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 백록담과 설문대 할망의 전설, 유구 태자에 관한 전설 등 당시 제주도의 전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 설화집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장한철의 표해록은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는 2008년에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장한철의 표해록 본문 /문화재청
장한철의 표해록 본문 /문화재청

 

장한철의 표류 여정은 17701225일부터 1771116일까지다.

1225일 한양으로 가는 장삿배에는 29명이 탔다. 뱃사람 10, 제주 상인 15, 육지 상인 2, 과거에 응시한 선비 2명인데, 이중 생존한 사람은 8명이다. 장한철은 처음에 탄 29명의 신분과 이름, 살아남은 8명의 이름도 기록해 두었다. 표류 당시의 상황을 장한철은 이렇게 서술했다.

조금 지나 밤이 깊어지자, 사방이 칠흑 같아 동쪽 서쪽을 분간할 수 없었다. 바람은 키질하듯 배를 흔들어 댔고 비도 퍼부어 댔다. 외로운 배가 파도 위에서 넘실거렸다. 우리가 탄 배에는 바닥으로부터 물이 많이 스며들어 왔다. 배 위에서는 항아리를 뒤집어 쏟아붓는 듯이 비가 내리쳤다. 배 안에 고인 물의 깊이가 이미 허리가 반이나 빠질 정도였다. 익사할 걱정이 급박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은 모두 누워 있기만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물을 퍼낼 뜻이 전혀 없었던 것은, 이렇든 저렇든 필시 끝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류 이틀째인 1226, 장한철은 서북풍이 불면 류큐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람들을 독려하고, 농담도 한다. 이는 태연한 척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한 것이었으나, 함께 과거길에 오른 김서일은 그런 장한철을 비난한다.

표류 3일째인 1227, 장한철은 물새가 있으니 뭍에 가깝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에게 살 수 있다고 희망을 준다. 하지만 밤에 모두들 잠든 뒤에는 홀로 근심으로 잠 못 이루며 가족들을 떠올린다.

표류하던 사람들은 류큐 호산도에서 안남의 상선에 의해 구조되어, 호산도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풍랑을 만났으나 다행스럽게 177116일 조선 땅인 청산도에 표착하게 된다. 청산도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19일에 장한철은 일행 중 사망한 21명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제문을 짓는다.

장한철은 청산도에서 겪은 로맨스도 기록했다. 청산도의 한 젊은 처자가 장한철에 연정을 느낀다. 장한철은 그녀를 조씨의 딸이라고만 적어 두었다. 조선시대 여인은 사대부 가문이라도 이름을 적지 않았다. 장한철과 하룻밤을 보낸 그 여인은 어머니가 이 섬에 시집 와 아들 조기백(趙起白)을 낳았고, 자신은 딸이라고만 소개했다.

 

장한철은 청산도에서 따듯한 대접을 받고 그길로 서울로 올라가 대과를 치렀으나 낙방했다. 그는 제주로 돌아와 그의 표류 경험담을 적어 글로 남겼다. 4년후 17755월에 별시에 합격해 제주도 대정현감(大靜縣監), 강원도 흡곡현령(歙谷縣令) 등의 관직을 맡았으나, 말직에 불과했다. 그가 즉은 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참고자료>

표해록으로 본 19세기 제주도 선비 장한철과 섬사람들”, 김미선, 2019, 전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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