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나’, 태국서 금지된 이유…과장-왜곡
영화 ‘왕과 나’, 태국서 금지된 이유…과장-왜곡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4.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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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꿋 왕을 잔혹한 인물로 묘사, 인종차별주의…태국 왕실에서 상영금지

 

1897년 태국 국왕 라마 5세는 영국을 방문하던 중에 30년전에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애나를 만났다. 애나는 1862~1867년 사이에 6년 가까이 방콕에 머물며 당시 국왕인 라마 4(몽꿋)와 왕자, 공주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에게서 영어를 배운 쭐라롱꼰 왕자는 1868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라마 5세로 등극했다.

영어를 배울 때 10대이던 왕자는 재위 30년이 된 위엄있는 국왕의 풍채를 드러냈고, 애나는 할머니가 되어 손녀와 함께 국왕을 알현했다. 당시 정황을 애나의 손녀 애나 피시(Anna Fyshe)는 이렇게 전했다.

라마 5세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당신은 왜 나의 부왕(父王)을 모욕하는 글을 썼습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를 완전히 조롱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습니까.”

그러자 애나는 자기가 쓴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고 우겼다. 그녀는 쫄라롱꼰 왕에게 부왕이 정말로 우스꽝스러웠고 잔혹하고 사악했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30년만에 이뤄진 선생과 제자의 만남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헐리웃 영화 왕과 나’(The King and I)에서 영국인 가정교사로 등장하는 여주인공 애나 레오노웬스(Anna Leonowens, 1831~1915)는 실제 인물이다. 다만 영화는 애나의 주관과 후세 영미 작가들의 인종차별적 사고에 의해 각색되었고, 따라서 과장하거나 왜곡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원작자인 애나의 태생과 인생여정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애나 레오노웬스 /위키피디아
애나 레오노웬스 /위키피디아

 

애나는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애나를 임신했을 때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병사였던 아버지가 사망했다. 어머니는 애나를 낳은 후 곧바로 또다른 군인과 재혼해 애나는 양부 밑에서 자랐다. 애나는 영어, 힌디어, 페르시아어 등을 공부했고, 어려서부터 글솜씨가 있었다고 한다.

애나는 18살에 아일랜드 출신의 청년과 결혼해 애를 넷 낳았는데, 그중 둘은 일찍 사망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웠다. 젊은 부부는 일자리를 찾아 호주, 싱가포르로 떠돌았는데, 결혼 10년째가 되던 1859년에 남편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애가 둘 딸린 28세의 과부는 생계가 시급했다. 어느날 싱가포르 영사관의 직원이 태국 왕실에서 영어 교사를 구하는데 갈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애나는 수락했고, 1862년 방콕의 샴 왕국 궁궐로 갔다.

그녀는 미국인 선교사 댄 비치 브래들리를 이어받아 왕과 왕비, 궁녀, 왕자, 공주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몽꿋 왕의 비빈은 39, 자식들만 82명이 되었다. 태국 왕실의 일부다처제는 오랜 전통이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애나가 샴 궁전에서 한 일은 왕실 가족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 뿐이었다. 영화에서처럼 국왕에게 서구적 관습을 가르쳐주어 샴 왕국의 개혁을 주도했다는 내용은 자신이 만들어낸 과장이고 허풍일 뿐이다. 차크리 왕조의 4대 라마 몽꿋은 제국주의의 침략 의도를 저지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서구화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왕이었다. 몽꿋 왕은 귀족들의 반발을 의식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했고, 그의 아들 쭐라롱꼰 시대에 대대적인 개혁이 추진된다. 하지만 애나는 나중에 자신의 권고로 몽꿋 왕이 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왕실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쓰고 떠들었는데, 그랬다면 당시 영국 영사관이나 방콕의 외교가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 방콕 사교클럽에 끼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1968년 몽꿋 왕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15살이던 왕자 쭐라롱꼰이 5대 라마에 올랐다. 새 왕은 애나에게 일자리를 연장해 주지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선왕이 셀위댄스”(Shall We dance?)를 요청하며 춤을 추는 사이었다면 유산도 조금 떼어 주었을 터인데, 그녀는 고맙다는 한마디만 듣고 왕실을 떠나야 했다.

 

라마 4세 몽꿋 왕(왼쪽)과 라마 5세가 되는 쭐라롱꼰 왕자 /위키피디아
라마 4세 몽꿋 왕(왼쪽)과 라마 5세가 되는 쭐라롱꼰 왕자 /위키피디아

 

1869년 애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하고 잡지에 글을 썼다. 애나는 샴 궁궐의 경험을 살려 글을 썼고, 동양의 신비주의에 매료된 미국인들에 의해 글값이 올라갔다. 그녀 보스턴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애틀랜틱하렘의 총애”(The Favorite of the Harem)라는 글을 썼는데, 뉴욕타임스가 사실에 근접한다며 호평을 냈다. 그녀는 아시아 왕실의 내부를 파헤치는 글이 인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70년 그녀는 샴 왕실의 영어 가정교사”(The English Governess at the Siamese Court)라는 회고록을 냈는데, 이 책이 선풍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녀는 유럽인의 비판적 시각에서 동양 궁궐생활을 서술했고, 국왕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장했다. 이 책이 영화와 뮤지컬 왕과 나의 원전이다.

 

몽꿋 왕의 실제모습과 뮤지컬에서 몽꿋왕을 분한 율 브리너 /위키피디아
몽꿋 왕의 실제모습과 뮤지컬에서 몽꿋왕을 분한 율 브리너 /위키피디아

 

애나 레오노웬스의 글은 많은 부분에서 사실을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몽꿋은 왕이 되기 전에 27년간 승려로 살면서 대중을 사랑하고 헌신했으며, 자기 절제력이 강했다. 그런데 애나는 몽꿋 왕을 잔혹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의 아들 쭐라롱꼰의 입장에서는 화가 치미는 대목일 것이다.

애나는 그후 페미니스트로서 활동하고 글을 썼다. 그녀는 샴 여인들의 종속적 삶을 비판했고, 왕실 여인들의 거처를 이슬람 세계의 하렘에 비유했다. 1873년 애너는 하렘의 로맨스”(Romance of the Harem)라는 작품을 썼다. 그 책에는 툽팀(Tuptim)이라는 궁녀가 왕에게 밉보여 모진 고문을 당하고 끝내 처형되는 것으로 그려졌다. 몽꿋 왕은 승려 출신이어서 살인을 극히 혐오했다. 태국 왕실은 불제자로서 왕이 그런 일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에서 인기 있는 작가와 강연자로서 여러 곳에서 초대를 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ㄷ. 툽팀의 손녀는 오랜 세월이 지난 2001년에 언론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몽꿋 왕에 의해 그렇게 죽지 않았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애나는 1888~1893년 딸과 함께 독일에서 살다가 캐나다에서 여생을 보냈다. 1901년 그녀는 78세의 나이로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에 관한 마지막 강의를 했다. 1915119일 그녀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비에 그녀가 토머스 레오노웬스의 아내라고 적혀 있는데, 남편의 계급은 소령이라고 했다. 남편의 마지막 계급은 병장이었다고 한다.

 

뮤지컬 ‘왕과 나’ /위키피디아
뮤지컬 ‘왕과 나’ /위키피디아

 

애나의 원작은 1944년 소설가 마가렛 랜튼(Margaret Landon)에 의해 애나와 샴 왕”(Anna and the King of Siam)이라는 소설로 개작되었다. 소설은 라마 4세와 영국인 미망인 애나와의 중년 로맨스를 다루었다. 1951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각색되어 초연했으며 호평을 받았다. 뮤지컬에는 배우 율 브리너가 라마 4세 역을 맡았다.

1960년 태국 국왕이었던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왕이 미국을 방문해 뮤지컬의 내용이 90% 과장되었다고 설명했다. 1985년 푸미폰 왕의 시리킷 왕비가 율 브리너의 초대를 받아 뮤지컬을 본 일이 있다. 당시 태국 대사관측은 뮤지컬이 인종 중심적이고, 태국인을 서구인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했다. 그후 마가렛 랜튼의 소설은 1956년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여러차례 리메이크되었다. 1999년에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태국에선 이 영화의 상영이 일체 금지되어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Anna Leonowens

Wikipedia, The King and I

Wikipedia, Chulalongk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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