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가 핀란드화 정책을 폐기하다
핀란드가 핀란드화 정책을 폐기하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5.1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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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방법으로 선택한 중립정책…우크라이나 침공 보며 다른 길 선택

 

지난해말 국제사회에 우크라이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핀란드화(Finlandization)란 개념이 제기된 적이 있다. 우크라이나가 중립국으로 전환하고, NATO에도 가입하지 않는 방안이었다. 그러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저지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핀란드화는 2014년 크리미아 반도 사태가 발생했을 때 헨리 키신저,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 등 미국의 내로라는 외교전문가들이 제안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 방안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오가며 이 방안을 내놓고 중재를 시도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는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에 의해 거부되어 없던 일이 되었다.

해가 바뀌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유럽은 긴장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러시아의 이웃국들은 자국이 우크라이나처럼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이젠 중립이란 개념도 필요없어 졌다. 러시아에 붙느냐, 러시아와 떨어지느냐의 양자택일만이 남았다. 벨라루스는 친러시아 정책을 고수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에 가세했다. 이에 비해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니아 등 발트3국은 일찌감치 2004년에 NATO에 가입,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이제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중립을 지키던 핀란드도 NATO에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과 산나 마린 총리는 15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NATO 가입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핀란드는 74년 만에 중립국 지위를 유지한 핀란드화란 개념을 폐기한 것으로 혜석된다.

핀란드화는 강대국와 이웃해 살면서 마지못해 선택한 결과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무력으로 개입하면 핀란드는 분연히 일어났다.

 

핀란드인들은 오랫동안 스웨덴 영토였다가 19세기초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핀란드는 대공국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군주가 동일한 형태로 러시아에 종속되었다.

러시아 지배하에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핀란드의 문물과 제도는 러시아보다 우월했다. 제국 러시아는 성급하게 핀란드를 러시아화하지 않았다. 핀란드인들이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 여론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지배 하에서 핀란드 민족주의 운동이 고양되었다. 이 기건애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귀족층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민속학자 엘리아스 뢴로트는 핀란드 전승가요를 채집해 칼레발라’(Kalevala)를 발간했다. 칼레발라는 핀란드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언어는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켰다. 핀어 사용운동은 정치적으로 페노만 운동(Fennoman movement)으로 발전해 반러시아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1863년에 핀어는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공용어의 하나가 되었고, 1892년에는 스웨덴어와 동등한 지위로 격상되었다. 핀란드 민족주의에 기여한 또다른 인물이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다. 시벨리우스가 1899년에 작곡한 핀란디아’(Finlandia)는 러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핀란드인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의 역할을 했다.

민족주의가 고양되자 러시아는 핀란드족 말살정책을 취했다. 러시아는 지배 말기에 핀족 문화를 말살하고 러시아풍으로 뜯어고치려 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의 러시아화를 시도했다. 1899년 러시아는 핀란드 의회의 동의 없이도 법령을 제정할수 있다록 했고, 1900년엔 러시아어롤 공용어로 사용토록 강요했다. 1901년에는 핀란드군을 제국군에 편입시키고, 훈련병을 러시아 훈련소에 입소시키도록 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은 우연하게 다가왔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지면서 핀란드는 독립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도 핀란드를 제압할 여력이 없어 독립을 승인했다.

독립후 핀란드에선 적백 내전이 벌어졌는데, 백군은 독일의 지원을 받아 승리했다. 193911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군대를 동원해 핀란드를 침공, 이른바 겨울전쟁을 벌였으나, 핀란드는 영토의 일부를 떼주고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2차 대전이 확대되어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핀란드는 독일 편에 서서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았으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연합국측으로 돌아섰고, 수복했던 땅도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에 돌려주었다.

 

1970년 4월 핀란드에서 발행된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위키피디아
1970년 4월 핀란드에서 발행된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위키피디아

 

2차 대전이 종전한 이후 동서 냉전이 격화하면서 핀란드는 이웃 소련의 침공 가능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1948년 소련과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의해서 핀란드는 중립 국가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핀란드는 미국의 마셜플랜에 참여하지 않았고, 소련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도 중립을 취했다. NATO는 물론 바르샤바 조약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 시절에 \핀란드인들은 자유를 제한당한 경험을 했다. 핀란드화 정책이 추구되던 시절에 핀란드 도서관에 반소련적 서적이 퇴출당했고, 언론에서 반소적 표현이 제거되었다. 법적으로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정부가 소련에 반하는 사회적 흐름을 금지시켰고, 사회 지도층들이 그런 분위기를 자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핀란드는 서방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1994NATO와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1995년에 EU에 가입하고 유로를 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친서방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핀란드로 하여금 중립정책을 포기하게 했다. 핀란드의 NATO 가입 발표에 러시아는 핀란드에 대한 전기공급을 끊었다. 이런 손해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는 친유럽, 친서방을 선택했다. 핀란드 지도자들은 전기를 끊기는 것보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막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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