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그후③…누르하치 굴기
임진왜란 그후③…누르하치 굴기
  • 아틀라스
  • 승인 2019.06.15 12: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역허가증으로 인삼, 모피, 진주 거래…왜란 시기에 군비 확장

 

15928월 일본 제2군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장악한 뒤 국경을 넘어 여진을 쳐들어갔다고 일본 기록들은 전한다.

함경도는 조선과 여진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조선인들은 여진을 야인(野人) 혹은 북호(北胡)라 부르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가토는 여진을 토벌해 위세를 보여주려 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가토의 여진 정벌에 종군을 원하는 조선인이 극히 많았다고 한다. 가토는 회령의 조선인 3,000명을 선봉으로 삼고, 일본인 8,000명으로 진용을 갖추어 두만강을 건너 만주 오랑카이(兀良哈)로 진격했다.

왜군의 여진 공격은 오래 가지 못했다. 꼳이어 함경도에서 정문부(鄭文孚) 등의 조선 의병이 일어나 후방이 취약해 졌기 때문이다.

전란이 한창 중이던 1595년 오랑캐의 족장이었던 누르하치는 기병대 수만명을 전선에 투입해 조선을 돕겠다고 호언했다. 조선은 오랑캐의 저의를 의심해 완곡하게 거절했다. 조선의 입장에선 바다건너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를 동시에 상대하기 버거웠을 것이다.

 

오랑카이 위치 /김현민
오랑카이 위치 /김현민

 

그러면 임진왜란 기록에 등장하는 오랑카이는 어디일까. 우리말 오랑캐의 어원이 된 곳이다.

오랑카이는 조선 최북단 함경도와 평안도 북쪽에 살고 있는 동여진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오량합(吾良哈) 또는 올량합(兀良哈)으로 혼재된 표현으로 나타난다.

오량합은 조선 초기부터 복속했다. 태조실록 원년(1392) 911일 기록에도 나온다.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유구국(琉球國) 사신과 오량합(吾良哈) 사람들이 조회에 참여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은 동반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오량합은 서반 4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그 종자들은 6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유구국에서 방물을 바치었다.”

유구국은 오키나와섬의 독립왕국이고, 오량합은 두만강 건너 여진족이다. 유구국은 일찍이 고려에서 불교 문화를 받아들이고 중국에서 유학을 받아들여 중국식 직제와 예절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문신의 자리인 동반에 넣었고, 여진의 일파 오량합은 조선에 예의를 갖췄지만 고려 이래로 국경에서 자주 무력충돌을 했기 때문에 무신 자리인 서반에 넣은 것이다.

조선초기엔 오량합 또는 올량합은 조선에 복속해 토산물을 조공으로 바치고, 이에 조선 임금이 의복등 하사품을 내려준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세종 때에는 오량합이 함경도와 평안도 국경지대를 침범해 조선인을 살해하고 약탈하기도 했고, 이에 조선왕실은 범인을 색출해 참수하기도 하거나, 군대를 보내 오량합을 영토밖으로 몰아냈다.

세종 171월엔 오량합이 2,7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평안북도 여연(閭延)을 포위했다. 이에 군수 김윤수 등이 군인을 인솔하고 성 위에서 대치하며 싸워 적 90명과 60여필의 말을 쏘아 명중시키니, 적들이 후퇴했다. 이 무렵 압록강 두만강 주변에 오량합 이외에도 홀라온(忽剌溫) 알타리(斡朶里) 올적합(兀狄哈) 등의 부족이 서로 내통해 조선 국경을 자주 처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세종임금은 무력을 사용해 이들 여진족을 제압했다. 세종은 최윤덕과 이천을 시켜 4군을, 김종서에게 명해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성종 때 신숙주, 윤필상 등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을 토벌했다. 국경선이 북으로 뻗어나가자 조선은 그 지역에 백성을 이주시키는 사민(徙民) 정책을 적극 실시했다. 수만의 남방 지역 민호를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토관 제도를 활용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면 임진왜란 당시 여진은 어떤 상태였는가.

16세기 중국 명()나라가 북로(北虜)라 불리는 몽골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만주 지방에도 서서히 상업의 물결이 다가왔다. 명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요동의 심양(瀋陽) 무순(撫順) 개원(開原)을 중심으로 쐐기모양으로 지배를 하고 있었고, 그 경계 밖에는 여진족들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상업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상업은 명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이뤄졌고, 상업으로 돈을 번 세력이 강한 무장 상업집단을 형성했다. 여진족 군벌들은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동원했으며, 이 병력은 명나라에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명의 여진족 지배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식이었다.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명은 여진족의 분열을 이용했다.

당시 요동지역의 명나라 군 사령관은 이성량(李成梁)이었다. 그는 조선 출신이며, 그의 맏아들 이여송(李如松)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출병하기도 했다. 이성량이 요동총병으로 있을 때인 1583년 만주 해서여진에 아타이(阿台)라는 족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성량은 만주에 뚜렷한 여진족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다. 역대 한족 왕조들은 여진이 1만이 되면 천하를 감당할수 없다”(女眞一萬天下不堪當)며 만주에 대세력가가 나타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전략을 취해왔다. 앞서 여진의 금()나라가 융성해 한족 송(=북송)나라가 양쯔강 이남으로 밀려난 경험이 있다.

 

명 말기의 만주 /KBS역사저널 캡쳐
명 말기의 만주 /KBS역사저널 캡쳐

 

이성량은 아타이 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명에 고분고분한 세력들을 규합했다.

1583년 누르하치(老乙可赤)의 할아버지 교창가(覺昌安), 아버지 타쿠시(塔克世)가 명의 편에 서서 아타이 토벌에 참전했다. 전투는 명나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아타이의 성이 함락되고 아타이는 피살되었다. 이때 사단이 벌어졌다. 아타이의 부인은 교창가의 손녀였다. 누르하치에겐 사촌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녀딸을 구하기 위해 성내 깊숙하게 들어갔다. 성을 함락한 명군은 여진족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 학살 대상에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포함됐다. 명군의 오인사격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이때 이성량과 누르하치의 심적 변화를 잘 살펴보자. 두 사람의 마음씨가 세상을 바꿔 놓았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이성량은 두 사람의 피살이 고의가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리곤 누르하치에게 명 황제가 내린 칙서(勅書)라는 상업허가증 60통을 줬다.

당시 명나라는 칙서를 통해 여진족을 통제했다. 이 칙서는 명에 우호적인 부족에게만 배분되었고, 저항하는 부족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이 증서가 있으면 떼돈을 벌었다.

 

누르하치는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나이 25. 부족도 통제하기 어려운 나이에 명나라와 대적할수 없었다. 언젠가 복수하리라, 생각하며 그는 조부와 부친의 목숨 값으로 얻은 교역허가증으로 돈을 벌었다.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는 60통의 칙서로 만주지역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만주의 주생산품은 인삼, 모피, 진주등이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바로 백두산 북쪽으로, 인삼이 잘 자라는 지역이다. 백두산 관광을 해본 사람이라면 길림성의 장뇌삼 쇼핑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인삼은 조선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명나라 교역을 장악했다. 누르하치 휘하의 상인들은 만주의 특산물을 베이징으로 가져가 몇의 폭리를 취했다. 거의 전매나 다름없었다.

누르하치는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고스란히 군비 확장에 썼다. 이성량이 미안한 마음에서 준 교역허가증이 누르하치라는 호랑이를 키운 셈이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족장이자, 군벌이요, 거상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상업으로 번 돈을 쌓아두지 않고, 여진족을 하나씩 하나씩 제압하는데 썼다. 1588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대부분을 통합했다.

 

이성량은 여기서도 우물쭈물했다. 곧바로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않고 그를 달래기 위해 건주위도독첨사(建州衛都督僉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누르하치는 이 벼슬을 내세워 주변의 여진족들에게 우위를 과시하는데 사용했다.

1589년 그는 스스로 왕을 칭하며 명을 위협했다. 하지만 명은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제압할 시기를 농쳤다. 곧이어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벌어지고, 명나라는 왜와의 전쟁에 휘말려 만주를 방치했다. , 만주에서 호랑이가 커 나가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청태조 누르하치 /위키피디아
청태조 누르하치 /바이두 백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