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그후④…비운의 류큐 왕국
임진왜란 그후④…비운의 류큐 왕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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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전쟁 지원 미흡했다는 이유로 사쓰마 침공…이후 사쓰마의 속국화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공통점은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이 충돌할 때 한반도와 오키나와는 격랑에 휘말렸다.

오키나와의 중심지 나하에서 중국 푸젠(福建)과의 거리가 오사카나 도쿄보다 가깝다.오키나와의 류큐국은 일본보다는 중국과 가깝게 지냈다. 조선과 류큐국(琉球國)은 중국에 조공하며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2세기경 오키나와섬 각지역에 아지(按司)라 불리는 호족이 생겨냈다. 호족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다가 점점 지역을 중심으로 호족 연합체가 형성됐다. 14세기초 류큐에는 3대 세력이 할거한다. 역사가들은 이를 남산(南山) 중산(中山) 북산(北山)의 삼산(三山)시대라고 일컫는다. 이중 가장 강력했던 중산국이 1416년 북산국을 쳐서 멸하고, 1429년 남산국을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하고, 류큐 열도에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이듬해인 1430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고, 명의 선덕제(宣德帝)는 하시에게 쇼()라는 왕성(王姓)과 함께 류큐(琉球)라는 국호를 내렸다. 류큐왕국의 초대국왕 쇼하시(尙巴志)1431년에 조선에도 사신을 보냈다.

 

류큐국 왕성 슈리성 /위키피디아
류큐국 왕성 슈리성 /위키피디아

 

16세기말 일본 열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통일된다. 전국(戰國)시대가 끝나고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은 류큐국에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도요토미 막부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공을 위한 전쟁준비를 하달했다. 그 명령이 명나라-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독립왕국 류큐에도 떨어졌다. 도요토미의 명령을 수행한 곳은 사쓰마(薩摩,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이었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한해 전인 15918월 사쓰마번의 시마즈에게 조선 침공을 위해 15,000명의 군역 부담을 명했다. 시마즈는 이 군역의 절반을 류큐에 떠넘겼다. 그해 10월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류큐왕국의 쇼네이(尚寧)왕에게 도요토미의 지시를 통보했다.

히데요시가 류큐와 사쓰마에 병력 15,000명을 동원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류큐는 멀리 있는 나라이고, 류큐군이 일본군의 전략에 익숙치 않다. 따라서 병력 동원에 류큐는 면제해 줄 터이니, 대신에 7,000명의 병력이 먹을 열달치 식량을 준비하라.”

사쓰마번이 류큐국에 요구한 것은 식량 11,250석과 황금 8,000냥이었다.

류큐의 쇼네이왕은 거부했다. 동시에 총리격인 삼사관 정형(鄭逈)을 명나라에 보내 도요토미가 조선과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사쓰마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뎃포(鐵砲)라는 이름의 조총이 전래된 곳이다. 1543년에 가고시마 남쪽의 다네가섬(種子島)에 표류하던 포르투갈인이 화승총인 조총(鳥銃)의 제조법을 전했고, 사쓰마는 조총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조총의 위력은 대단했다.

쇼네이왕도 사쓰마의 무장력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초에 요구하는 군비 모두를 준비할수 없으니, 요구한 물량의 절반이라도 받아달라고 했고, 사쓰마도 마지못해 응했다.

여기서부터 사쓰마는 언젠가 류큐에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1593년 사쓰마는 류큐 사신을 억류하기도 했다.

 

쇼네이왕(尚寧王) /위키피디아
쇼네이왕(尚寧王) /위키피디아

 

1598년 도요토미가 사망하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났다. 천하는 다시 요동쳤고, 최후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602년 센다이(仙臺) 번 영내에 류큐 선박이 좌초했는데, 도쿠가와의 명령으로 그 배는 1603년에 류큐에 송환되었다. 이후 도쿠가와는 사쓰마를 통해 사은사 파견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류큐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한편 사쓰마는 류큐에 시마즈 가문의 운항허가서를 가지고 있지 않는 선박의 단속을 요구했고, 류큐 측이 이를 거부했다. 이후 류큐와 사쓰마의 우호 관계가 무너지고 적대 관계로 기울어 졌다.

16089월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사신을 류큐에 보내 도쿠가와 막부의 초빙에 응하라고 설득했지만, 류큐 왕실은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사신으로 온 승려를 욕을 보였다. 결국 막부는 류큐를 정벌하라는 어지를 내렸고, 사쓰마의 시마즈씨는 이를 받아 류큐 정벌에 나섰다.

 

사쓰마의 병력은 군인 3,000, 전함 100척이었다. 대장군에 가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 부장군에는 히라타 마쓰무네(平田増宗)를 임명했다. 160931일 병력은 야마카와(山川)항에 집결해 번주인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의 사열은 받은 뒤 순풍을 기다려 4일 새벽에 출항했다.

오키나와 본섬에 처들어가기 이전에 류큐의 저항은 없었다. 사쓰마군은 여러 섬을 거쳐 47일 류큐 영토인 아마미오 섬에 도착했다. 주민들은 사쓰마군에 협력했다. 현지 족장들은 주민들에게 사쓰마에 항복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사쓰마군은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섬 하나씩 점령해 들어갔지만, 류큐 사람들은 아무도 사쓰마의 침공을 쇼네이 국왕에게 전하지 않았다. 쇼네이왕이 사쓰마의 침공사실은 안 것은 410일로, 외적의 공격을 받은지 한달이 훌쩍 지난후였다.

일부 섬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사쓰마 군대의 포격으로 군중들이 줄행랑을 쳤다. 사쓰마의 대포 한방에 수십명의 섬 주민이 죽자, 남은 주민들은 무조건 항복했다.

425일 사쓰마군은 드디어 오키나와섬 북부에 상륙해 나키진(今帰仁)성 일대를 점령했다. 수도 슈리성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키진이 함락되자 쇼네이왕은 다급해졌다. 그는 기쿠인(菊隠)이라는 불교지도자를 불러 명을 내렸다.

당신은 시마즈 가문의 영주들과 잘 아는 사이이니,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오시오.”

기쿠인은 국왕의 특사로 임명돼 나키진으로 향했다. 기쿠안은 사쓰마 대장군 가바야마와 협상을 벌였지만, 가바야마의 기만전술에 휘말렸다. 가바야마는 협상을 슈리성의 외항인 나하항에서 하자고 했다. 기쿠안은 가바야마의 제안을 쇼네이에게 전했다.

51일 사쓰마의 선단은 나하항에 진입했다. 나하의 오야미세(親見世)라는 곳에서 쇼네이왕과 가바야마 대장군 사이에 평화회담이 열렸다. 동시에 사쓰마 선단은 슈리성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나하항에 머물던 사쓰마군이 재빠르게 슈리성을 향해 움직였다.

사쓰마군은 애초부터 평화회담을 할 생각이 없었다. 류큐 국왕이 철저히 속은 것이다. 쇼네이왕은 동생인 쇼코(尚宏)3명의 대신을 사쓰마에 인질로 주었다. 바보같은 왕이다. 자신도 인질이 될줄 몰랐다니. 55일 사쓰마군은 슈리성을 완전 접수했다. 사쓰마가 군대를 출항시킨지 두달만이다.

 

사쓰마의 류큐 침공로 /위키피디아
사쓰마의 류큐 침공로 /위키피디아

 

평화는 달콤한 것이다. 류큐왕국은 1429년 통일후 180년 동안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중국 명나라만 섬기면 되었고, 일본은 온국토가 전쟁터인 전국시대였다. 일본에 하나의 큰 세력이 형성되고,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에도 류큐는 남의 일로만 여기고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류큐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무()보다 문()을 숭상했다.

류큐국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守禮之邦)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군비다운 군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다. 이미 15세기말부터 국왕은 호족(아지)을 슈리성에 불러 살게 하고, 아지와 부하들의 칼과 화살등 무기를 모두 거두어 들였다. 이는 국내 지배에는 편리했지만, 외적의 침입에 거의 대비할수 없게 만들었다. 무사안일의 단꿈에 사로잡혀 있던 류큐는 사쓰마라는 지방 번()의 사무라이 3,000명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다.

쇼네이왕은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겼다. 사쓰마군은 국왕은 물론 군신 100명을 배에 태우고 본토로 압송했다. 슈리성을 함락한지 12일째 되는 517일이었다.

이듬해인 16108월 쇼네이왕과 신하들은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고 순푸(駿府)성에서 상왕 노릇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어 에도(江戸)로 가 도쿠가와 가문의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를 알현했다. 그리고 다시 사쓰마로 끌려갔다.

사쓰마에서 쇼네이왕과 고관들은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했다. 사쓰마는 국왕 석방 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류큐는 영원히 사쓰마의 번속(속국)이 되어야 하며, 류큐왕이 사쓰마에 반할 때 신하와 백성들이 이에 협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저히 들어줄수 없는 조건이 제시됐다.

 

오키나와와 가고시마 현의 해상경계 /위키피디아
오키나와와 가고시마 현의 해상경계 /위키피디아

 

류큐에도 충신은 있었다. 한때 류큐의 재상을 맡았던 정형(鄭逈)은 사쓰마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고 조건을 결코 수락할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자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는 쇼네이왕과 왕자,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형을 기름이 펄펄 끓는 솥에 뎐져 삶아 죽여 버렸다.

쇼네이 국왕은 기겁을 했다.

사쓰마는 15개 조항을 제시했다. 쇼네이는 사쓰마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 국왕과 그의 신하들은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 앞에서 류큐는 사쓰마의 속국이라고 선언하고, 조공을 바치며 사은사를 보내겠다고 맹서했다. 이에 사쓰마 번주는 국왕과 신하들이 귀국해 권좌를 회복할수 있도록 하겠다며 자애로운 은혜를 베풀었다. 치욕적이고, 굴종적인 맹약이었다.

그렇게 26개월간 끌려다니다가 1611년 슈네이는 오키나와섬 슈리성으로 돌아왔다. 국왕이 압송되고 부재할 때 사쓰마 점령군의 가바야마 히사타카 대장군이 시마즈 가문을 대신해 통치하고 있었다. 사실상 시마스 가문의 직할령으로 떨어진 것이다.

국왕이 돌아왔을 때 통치는 허용되었지만, 류큐의 고위관료들은 사쓰마에 인질로 보내져야 했다.

류큐국은 형식적으로 막부의 번국(藩國)과는 다른 이국(異国) 위치로 격상되었지만, 사실상 사쓰마번의 위성국 또는 허수아비국가로 전락했다. 사쓰마와의 맹약에 의해 류큐는 해외 무역과 외교, 여향등이 사쓰마에 의해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류큐의 북방의 토카라지마등 5개 섬이 사쓰마로 빼앗겼다. 현재 류큐 열도 최북단의 섬들이 오키나와현이 아니라 가고시마현에 속하게 된 사연이다. 사쓰마는 류큐에 재번봉행(在蕃奉行)이라는 감독관을 슈리성에 상주시켰다.

사쓰마는 류큐가 중국에 대해 조공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직 중국을 두려워한 것이다. 따라서 류큐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나라에 의해 지배받는 이중 속국으로 전락했다.

 

본토에 압송됐던 쇼네이 국왕이 2년반의 갖은 수난을 겪은후 1611년 귀국했지만, 나라는 속국이 되어 있었다. 사쓰마와의 조약에 의해 왕의 지위는 되찾았지만, 사쓰마에서 파견된 감독관에 의해 왕실의 모든 것이 통제되고 감시를 받았다. 그는 충신 정형이 사쓰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죽을 때까지 거의 혼줄을 놓은 사람처럼 살았다고 한다.

 

일본 가고시마현의 한 신사에 있는 사쓰마의 류큐 정벌 유적지비 /사무라이위키
일본 가고시마현의 한 신사에 있는 사쓰마의 류큐 정벌 유적지비 /사무라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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