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섬 ‘요도와 삼봉도’①…울릉도 뱃길
미지의 섬 ‘요도와 삼봉도’①…울릉도 뱃길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22.06.04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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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에 왕명으로 섬의 실체 확인 작업…울릉도 설과 독도 설

 

이 글은 해양탐험가이자 이사부기념사업회 이사인 이효웅씨가 2022년 해양학자대회에 제출한 논문 조선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항해와 요도 및 삼봉도의 실체. 3회로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주

 

. 머리말

 

옛부터 바닷가에 거주하는 어민들이 혼란한 사회를 피해 울릉도에 이주했다. 조선 태종 때 안무사 김인우는 울릉도에 가서 거주민들을 데려왔다. 주1) 세종실록에는 요도(蓼島)에 관한 기록이 12번 나오고, 주2) 성종실록에는 삼봉도(三峰島)의 기록이 무려 47번 나온다. 주3) 13세기에 이승휴는 삼척의 요전산성 주4)에서 무릉도(울릉도)를 보았고 주5), 세종 때 갑사(甲士) 최운저는 삼척 봉화현(광진산 봉수대)에서 요도를 보았다고 하였다. 조선의 성종은 영안도 관찰사 정난종에게 무릉도라는 섬에 대해 조사할 것을 명했다. 주6)

그리고 17세기 말에는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독도를 넘나들기 시작하면서 어복(魚鰒)과 향죽(香竹), 강치 등을 남획하여 갔다. 주7) 1692년 조선 어민들도 전복 등을 채취하러 다니다 일본 어민들과 만났다. 일본 어민들은 1693년 울릉도에서 조업 중인 안용복과 박어둔을 강제로 납치하여 돗토리현으로 데려갔다. 주8) 일본에 다녀온 안용복은 1696년 울릉도와 독도에서 몰래 고기를 잡는 일본 어부들을 쫒아내기 위하여 일본에 가서 항의를 하였다.

조선시대 울릉도 항해는 강원도 삼척과 울진이 가장 가까워서 많이 항해하였을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울릉도는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가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강원도 어민들은 함부로 울릉도에 갈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태백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영동 지방은 양간지풍(襄杆之風)이라 하는 봄철 건조한 강풍이 가끔 분다. 주9) 그래서 동해안의 어민들이나 수토사들은 서풍이 불 때까지 일주일이든 보름이든 대기해야 했다. 그러나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쪽의 어민들은 남풍과 해류를 이용하여 훨씬 수월하게 울릉도로 찾아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함경도 어민들은 북쪽의 경원에서부터 북서풍을 이용하여 울릉도 항해를 하였다.

조선 전기의 요도와 삼봉도에 관한 연구에서 손승철, 유미림, 정연식 등의 학자들은 요도와 삼봉도의 실체를 울릉도로 파악하고 있고, 정연식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도와 삼봉도를 검증하려고 하였다. 그리나 선우영준은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10) 연구자는 본 연구에서 조선시대 어민들이 울릉도·독도 항해를 어떻게 하였는지 살펴보면서 요도와 삼봉도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항로 /그래픽=이효웅
조선시대 항로 /그래픽=이효웅
요도탐사대 항로 /그래픽=이효웅
요도탐사대 항로 /그래픽=이효웅

 

. 조선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항해

 

함경도 남쪽 어민들의 울릉도 항해는 원산에서 연안 항해를 하여 장전항을 지나 양양까지 내려와서 대청봉(1708m)을 이정표로 삼고, 태양과 달을 가늠하여 남동쪽으로 사선항해를 하였다. 그래서 설악산 대청봉을 중심으로 항해하였으므로 양양 앞바다에 새로운 섬이 있다고 하였을 것이다. 함경도 북쪽 어민들은 반대로 북쪽으로 올라가서 경원에서 남쪽으로 태양과 북극성을 이용하여 정남항해를 하였다.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 어민들은 영해나 축산에서 남풍을 이용하여 북동쪽으로 사선항해를 하였다. 그러나 강원도 어민들은 삼척포와 월성포에 수군진영이 있기 때문에 울릉도에 갈 수 없었다.

 

1-1. 조선 전기의 함경도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항해

 

바닷가의 어민들은 세금과 군역 등을 피해 이상향인 동쪽바다의 울릉도를 찾았다. 당시 울릉도는 섬에서 민중을 해방시킬 정진인(鄭眞人)이 출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해도출병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울릉도는 동해의 이상향으로 희구되었다. 주11) 그리고 양양 앞 바다에 요도가 있다고 소문이 나서 함경도 관찰사는 전에 갔다 온 김한경 등 12인에게 요도를 찾게 하였다. 요도탐사대 김자주는 동해의 섬에 갔다 와서 보고하기를,

 

"지난 9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고 하였다." 주12)

 

김자주, 김한경의 함길도 항로를 살펴보면, 경성(옹구미:청진시)-부령(청암:청진항)-회령(가린곶:가린단)-경원(말응대)이다. 마지막 출항지가 경원의 말응대(신진?)는 북쪽에서 가장 좋은 항구인 오늘날의 나선항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서 울릉도 성인봉까지는 약528km(285.2해리, 174.5), 독도까지는 약570km(308해리, 166)이다. 당시의 항해 방법을 추측해 보면, 경성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간 것은 동해상의 이정표인 울릉도를 향하여 태양과 북극성을 이용한 정남항해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을철 북서풍이 부는 맑은 날 항해하면 약 4(3.5노트(6.5km)x24시간x4=624km)이면 갈 수 있다. 그런데 919일 경원에서 출항하여 4(43) 주13) 걸려 925일에 도착한 것은 바람이 잦아들었거나 방향이 바뀌었다고 본다 (로 계속)

 

 


주1) 『태종실록 33, 태종 1725일 임술 3번째 기사,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다.

주2) 『세종실록 46, 세종 111227일 기해 4번째 기사, 봉상시 윤(奉常寺尹) 이안경(李安敬)을 강원도에 보내어 요도(蓼島)를 방문하게 하였다.

주3) 『성종실록 8, 성종 11211일 갑인 4번째 기사, 영안도 관찰사 이계손에게 삼봉도에 투항한 자를 탐문하여 아뢰라고 명하다.

주4) 1253년 가을, 이승휴는 몽골 침입에 대항하여 삼척의 산성에서 오랫동안 피난하면서 괴롭고 고단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무릉도(울릉도)를 보고 시를 읊고 蓼田山城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주5) 연구자는 이승휴의 요전산성은 두타산 아래의 쉰움산 오십정을 말하며 여기에서 무릉도를 보았다고 본다. 그리고 지난 십여 년 동안 삼척 인근지역 5곳에서 울릉도를 촬영하였다.(소공대, 초록봉, 광진산 전망대, 광진산 인근, 개산길 전망대)

주6) 『성종실록 26, 성종 419일 경자 2번째 기사, “세상에서 전해 오기를, ‘무릉도의 북쪽에 요도(蓼島)가 있는데 한 사람도 다녀온 사람이 없다.’ 하니, 이것도 의심스럽다. ()이 다시 바닷가에 사는 늙은 뱃사람을 찾아가 물어 상세히 밝혀서 아뢰라.”

주7) 쿠보이노리오 저, 이장우 역, 지도해설 독도의 진실일본학자가 조사한 독도는 한국 땅, 부산민족학교 독도학당, 2017, 93~95.

주8) 오오니시 토시테루 저, 권정 역, 안용복과 원록각서, 한국학술정보, 2011, 28~37.

주9) 「봄철 영동지역 국지 하강풍 메커니즘과 지형 효과에 대한 연구, 김정훈, 2006. Atmosphere, 16(2), 67.

주10) 손승철, 조선전기 요도와 삼봉도의 실체에 관한 연구, 한일관계사연구44, 2013, 57~78. ; 정연식, 15세기의 蓼島, 三峯島와 울릉도, 조선시대사학보92, 2020, 41~94. ; 유미림, 울릉도독도의 명칭 변천과 독도인식의 연속성, 해양정책연구 2021년 겨울호362, 34~37. ; 선우영준, “조선 성종때 발견한 삼봉도는 독도가 맞다”, 한겨레(2007.10.27.).

주11) 주강현, 독도견문록, 웅진싱크빅, 2008, 26.

주12) 『성종실록 72, 성종 7(1476) 1027일 정유 2번째 기사, 병조에서 삼봉도의 발견 경위를 밝히고 명년에 문무 재능자를 뽑아 보내자고 하다.

주13) 성종실록 72, 성종 71022일 임진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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