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문명] 기상이변으로 멸망한 앙코르제국
[물과 문명] 기상이변으로 멸망한 앙코르제국
  • 아틀라스
  • 승인 2019.03.1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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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방문해 의문…멸망 원인은 기상이변설, 계급질서 붕괴설 등 다양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캄보디아 시엠립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앙코르와트를 둘러 보았다. 문 대통령은 앙코르와트 내 프레아피투 사원 복원 정비사업 현장을 들러 한국 근무자들을 격려하고, 앙코르와트 내부를 둘러 보았다.

문 대통령은 앙코르와트 내 석상에 새겨진 문자를 보며 "이런 문자가 해독이 되느냐. 이렇게 큰 왕국이 어느 날 갑자기 쇠락한 것인가"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그러면 문 대통령이 궁금해 한 앙코를 제국의 멸망을 추적해 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캄보디아 시엠립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앙코르와트를 둘러 보고, 프레아피투 사원 복원 정비사업 현장의 한국 근무자들을 격려했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캄보디아 시엠립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앙코르와트를 둘러 보고, 프레아피투 사원 복원 정비사업 현장의 한국 근무자들을 격려했다. /청와대

 

 

필자는 몇 년전에 캄보디아 씨엠립(Siem Reap)에 있는 크메르 왕국의 고대 유물을 둘러보고 온 적이 있다. 그땐 앙코르 와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만 가지고 떠났다. 어느날 TV 다큐멘터리를 보았더니 서양의 한 탐험가에 의해 밀림지대에 오랫동안 감추어진 비밀의 궁전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앙코르 와트(Angkor Wat)라는 것이었다. 저 밀림 속 제국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냥 가볍게 머리나 식히자는 차원에서 가족여행 개념으로 다녀왔다.

그때 고대유물을 관광하며 가이더의 얘기를 듣고 놀란 사실은 앙코르 왕국이 9~14세기에 지금의 캄보디아는 물론 태국, 라오스, 베트남 남부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거대한 제국의 왕궁과 무덤이 어느날 갑자기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19세기에 들어와 서양인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왕국은 어떻게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어떻게 갑작스럽게 멸망하고 잊혀 졌을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앙코르 제국에 관한 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1860년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오(Henri Mouhot)는 원주민들 사이에 전설 속의 신()이 지었다는 앙코르 왕도(王都)를 찾아 나섰다. 그는 고대 크메르왕국 수도가 있었던 씨엠립 지역에서 3주일을 보내면서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바이욘 사원, 프놈 바켕 등을 둘러보았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솔로몬왕의 신전에 버금가고, 미켈란젤로와 같이 뛰어난 조각가가 세운 앙코르 와트, 이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인이 세운 것보다도 더 장엄하다.”.

그는 밀림 속에 잠들어 있던 앙코르 제국을 유럽에 소개했고, 그 뒤를 이어 유럽인들이 이 고대 제국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 그 베일을 하나씩 벗겨냈다.

앙리 무오에 앞서 1850년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그곳을 방문한 사람은 프랑스의 샤롤 에밀 부유보(Charles-Émile Bouillevaux) 신부였다. 그는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웅대한 건축물을 보고 놀랐다. 앙리 무오는 그의 기행문에 자극을 받아 앙코르 와트에 대한 꿈을 키웠다.

 

공중에서 촬영한 앙코르 와트 /위키피디아
공중에서 촬영한 앙코르 와트 /위키피디아

 

 

필자가 방문한 시기는 건기의 끝무렵인 20123월초. 앙코르 제국의 젖줄인 톤레삽(Tonle Sap) 호수의 수위가 최저로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먼저 TV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앙코르 와트를 가보았다. 우선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외벽은 동서 1.5km, 남북 1.2km의 직사각형이고, 바깥은 해자로 둘러 싸여 있었다. 외부에서 190m나 되는 해자를 건너려면 육교를 건너야 한다. 해자를 건너면 3기의 탑이 있고, 참배로를 따라가면 중앙사원이 나온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도시)와 와트(사원)의 합성어로, ‘도시의 사원또는 사원의 도시라는 의미가 된다. 동쪽 회랑 남반부 벽에는 악마와 신들이 머리 다섯인 뱀(바수키)을 잡고 줄자리기를 하는 49m 길이의 거대한 부조물이 있다.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신화 가운데 우유바다 휘젖기에서 선과 악의 싸움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당연히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앙코르 와트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많지 않다.

주달관(周達觀) /씨엠립 민속문화촌
주달관(周達觀) /씨엠립 민속문화촌

 

1296~97년 몽골() 제국의 사신으로 크메르 왕국을 방문한 주달관(周達觀)은 그의 기행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앙코르 와트에 대해 노반의 묘’(鲁班墓)라고 표현했다. 노반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건축의 대가를 말하는데, 주달관은 그의 이름을 빗대 아주 유명한 건축기가 지은 무덤이른 뜻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주달관의 해석에 따르면 앙코르 와트는 무덤이다.

캄보디아 전설에는 앙코르 와트가 원래 왕궁이었다가 왕의 사후에 무덤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이 거대한 무덤에 묻힌 왕은 누구인가.

캄보디아를 식민화한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와트의 회랑 부조를 관찰한 결과, 수리야바르만 2(재위 1113~1150)라고 추정했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8대 현종에서 11대 문종까지의 시기다. 고려는 불교왕국이었는데, 이만한 무덤과 사원은 없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베트남 북부 대월국(大越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베트남 남부 참파왕국을 공격해 코끼리에 올라탄 참파 왕의 목을 베었다. 그가 앙코르 와트를 건설한 것은 정복욕만큼이나 사후에 천국에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앙코르 와트 모습 /사진=김인영
앙코르 와트 모습 /사진=김인영

 

 

다음 행선지는 앙코르 톰(Angkor Thom)이었다. 앙코르(도시)와 톰(위대하다)라는 단어가 합쳐져 위대한 도시라는 의미의 성곽도시다.

앙코르톰의 주인공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1177년 베트남 남부 참파왕국의 공격으로 크메르 왕이 죽고 수도가 파괴되었는데 한 왕자가 이 '침략군'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니 자야바르만 7(1181-1218). 그 왕이 앙코르 톰을 건설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시기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다. 왕위에 오른 자이바르만 7세는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꾸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국가 쇄신책을 추진한다. 그는 싯다르타 붓다가 부패한 힌두교 사제를 끌어내리듯 불교를 동원해 힌두교 중심의 구질서를 개혁하려 했다.

그가 받아들인 불교는 대승불교였다. 그는 자비로운 군주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스스로를 부다나자(부처왕)라고 불렀다. 대승불교는 깨달음 위주의 소승불교와 달리 통치 이념이 강한 불교로서, 중생 구원을 목표로 하는 신앙이다. 대표적인 불상이 관음보살상이다. 앙코르 톰 성벽의 출입문, 바이욘 사원, 타 프롬 사원에 세워진 관음보살상은 자야바르만 7세의 통치이념을 보여준다.

그는 제국의 도로를 정비했다. 앙코르에서 태국 피마이 지역까지 225km의 도로를 뚫었다. 이런 도로를 기반으로 이 임금은 서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부, 북쪽으로 라오스 일대, 동쪽으로 참파왕국까지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때 태국지 역에 건설한 도로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앙코르 톰은 1431년 태국이 세력을 확장해 도성을 함락할 때까지 2세기 동안 앙코르 제국의 왕도로서 역할을 했다.

 

앙코르 톰의 돌벽에 나무가 자라 뱀처럼 휘감고 있다. /사진=김인영
앙코르 톰의 돌벽에 나무가 자라 뱀처럼 휘감고 있다. /사진=김인영

 

 

캄보디아에 최초로 나라가 선 것은 1세기경 푸난(Funan)으로 중국 기록엔 부남(扶南)으로 나온다. 지금의 캄보디아와 베트남 남부 메콩강 하류, 태국, 말레이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당시 부남은 여러 지방세력이 연합한 연방국가로 산스크리트를 사용하고 바라문 승려와 불경이 혼재한 인도문화 영향권에 있었다.

부남은 550년께 북쪽에서 내려온 진랍(眞臘, Chenla)에 흡수되었고, 진랍은 770년에 메콩강 하류지역의 수()진랍과 내륙의 육()진랍으로 분리되었다.

그후 수진랍의 왕이 인도네시아 해상왕국인 샤일렌드라 왕조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탈출해 802년에 새 왕조를 열었는데, 그가 앙코르 왕조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다. 앙코르 왕조는 12세기 무렵에 지금의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말레이시아 일부를 포함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앙코르 왕조는 자야바르만 2세가 건국한 802년부터 태국에 의해 멸망하는 1431년까지 600년간 지속했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통일신라 장보고 시절부터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까지다.

전성기 시절에 수도 앙코르 톰에는 100만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 런던 인구가 7만명에 불과했다.

13세기에 세계최대의 제국을 형성한 몽골()은 중국과 베트남을 지배하고, 미얀마와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지만, 앙코르 제국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원나라는 주달관과 같은 하급 관리를 사신으로 보내 앙코르 제국을 명분상으로 속국화하지만, 실제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주달관도 그의 진랍풍토기에서 이를 인정했다.

원나라는 점성(참파)에는 사도원수를 파견하고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캄보디아에는 호부만호와 금패천호를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이들 장수들이 부임 도중에 잡혀서 그후 소식이 단절되었다. 이에 따라 원나라는 1295년에 사신을 보내 크메르를 굴복시켰다.

주달관은 중국 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어서 자신이 마치 칙사나 된 듯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기행문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크메르 왕국을 굴복시켰다고는 했지만, 앞서의 사신들처럼 죽어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중부유럽까지 침공했던 몽골이 무력을 쓰지 않고 외교로 관계를 유지하려 한 사실은 그만큼 앙코르 제국의 힘이 컸다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몽골도 건드리지 못한 이 제국이 왜 어느날 갑자기 멸망했을까.

 

앙코르 제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앙코르 제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큰 궁궐을 짓고 피라미드보다 웅대한 묘당을 건설하며 미켈란젤로만큼 뛰어난 조각을 창조한 거대한 앙코르 제국은 1431년 멸망한 후 캄보디아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열대림의 아름드리 뿌리가 건축물 곳곳을 파고들어가 뱀처럼 칭칭 감도록 앙코르 유적은 19세기 중엽 유럽인들이 발견할 때까지 400년 이상 방치되었다. 캄보디아의 역사 기록물, 앙코르 제국을 멸한 태국의 역사서에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없다. 서양의 학자들이 이 의문에 도전했다. 수많은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앙코르 제국의 몰락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앙코르 제국을 멸망시킨 팩트는 1431년 태국 지역에서 발원한 아유타야 왕국의 침입이다.

현재 태국의 샴(Siam) 지역은 오랫동안 앙코르 제국의 속국이었다. 앙코르 제국 말기에 샴 지역 남쪽에 수코타이 왕조가, 북쪽엔 치엥마이 왕조가 들어섰다가 1350년 아유타야 왕조가 신흥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아유타야 왕국은 1430~1431년 앙코르 제국을 침공해 점령했다. 아유타야의 왕 파라마라자는 앙코르의 다르마쇼카왕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 인드라파트를 점령지 통치자로 세웠다. 그리고 600년 역사의 앙코르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 1,000여개의 사원, 민속무용등을 압살하고, 대신과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앙코르의 왕자 폰하 야트는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점령자인 인드라파트를 죽이고 나라를 제건했다. 하지만 도성의 수리시설은 파괴되고 적(태국)의 반격을 맞아 도성을 포기하고 톤레삽 호수와 메콩강이 만나는 프놈으로 도읍을 이전했다. 이후 왕도에 남아있던 옛 앙코르족과 새 왕조와의 관계는 끊어진다. 도성을 포기한 캄보디아의 새 왕조는 밀림의 부족장으로 명맥을 유지하지만, 더 이상 거대한 앙코르 제국의 주인은 아니었다. 캄보디아 역사에서 이 기간을 암흑기(dark age)라 부른다.

 

주달관의 행로 /그래픽=김인영
주달관의 행로 /그래픽=김인영

 

 

그러면 앙코르 제국은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걸었을까. 타이족이 그토록 강력했던 것일까.

인도차이나에서 타이족의 역사는 짧다. 이 족속은 중국 윈난(雲南)성에서 발원해 중국 한족이 팽창하면서 10세기 이후 메콩강을 따라 서서히 남하해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주했다. 12세기에 건축된 앙코르 와트 회랑 부조물에 타이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앙코르인들은 타이족을 야만인으로 묘사했다. 부조물에서 타이족 병사들은 규율이 없어 보인다. 발을 맞추지도 않고 병사들끼리 히히덕거리기도 한다. 들고 있는 창의 각도도 엉망이고, 입은 옷도 아랫부분이 차마같이 넓게 퍼져 있어 전투에 효율성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얕잡아 보던 타이인들에게 앙코르인들은 문화적 우월감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제국을 넘겨주었다. 신흥 아유타야 왕국이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것은 앙코르 왕조가 급격히 쇠퇴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에 공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몇가지 견해를 인용해 보자.

 

기상이변설

201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진은 앙코르 제국의 몰락이 장기간 지속된 가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이 지역 나무들의 나이테를 연구한 결과 가뭄이 오래 지속되고, 그 사이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기후 이변을 겪었음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최대 저수지인 웨스트 바레이 터에서 앙코르 왕국이 멸망할 무렵에 이 지역 강우량이 이전에 비해 10분의1로 줄어 들었다는 증거를 찾아 냈다. 웨스트 바레이 저수지는매우 복잡한 수로와 해자, 둑이 왕도와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다. 앙코르인들은 여름 우기에 내린 빗물을 저수지에 저장했다가 가뭄이 들면 논 물로 이용했다.

그러나 가뭄으로 저수량과 퇴적물이 줄어들면서 저수지 주변 생태계도 크게 바뀌어 호수 밑바닥에 살던 조류와 부유식물이 기승을 부리게 됐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왕조의 방대한 물 관리 체계도 급격한 기후 변화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톤레삽 호수의 수상가옥 /사진=김인영
톤레삽 호수의 수상가옥 /사진=김인영

 

 

계급질서의 붕괴

앙코르 톰을 만든 자야바르만 7세는 대승불교를 도입했다. 대승불교는 피지배계층과 유리되었다.

왕은 자신이 부처라고 주장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대승불교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사원을 짓고 왕궁을 건설했다.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백성들에겐 대승불교란 피곤한 이데올로기였다. 피지배계급은 조용하게 명상하며 스스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소승불교가 더 매력적이었다. 왕은 인자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을 곳곳에 세웠지만, 피지배계층의 신앙심을 얻는데 실패했다. 대승불교는 당시 동남아시아의 주류 종교는 아니었다. 왕은 중국, 고려 등지에서 번성하는 이질적인 외국의 종교를 끌고와 결국엔 국민들과 유리되었다.

지배계층은 고도의 문화를 구가했지만 피지배계층은 노역과 빈곤에 시달렸다. 그들에겐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 앙코르 왕조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없었다.

강제 노동을 강조하는 사회는 어느날 갑자기 무너질수 있다. 만리장성을 쌓았던 중국의 진()나라, 대운하를 뚫은 수()나라도 반역자의 반란에 순식간에 멸망했다. 피라미드를 세운 이집트도 문명을 송두리째 잃었다.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문화를 형성했던 앙코르는 건국한지 100년도 되지 않은 야만인 타이족의 나라에 쉽게 멸망했다. 외부의 적이 강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가 썩을대로 썩었고, 무너질대로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왕조사의 단순한 궁정반란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저 거대한 무덤과 왕도(王都), 그 자체가 몰락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바벨탑의 저주라 할까. 대규모 건축물을 건설하기 위해 백성과 타민족을 노예처럼 부렸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방대한 관료집단을 조직해야 했다. 관료집단은 부패하고, 지배계층의 호화로움은 극에 달했다. 도성 중앙에 급탑을 쌓고 금다리를 놓았다. 금불상을 만들어 우상화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것이다.

 

제국은 변경에서 무너진다. 로마제국은 변경의 야만 게르만족의 침공에 무너졌고, 중국의 한족 국가도 변경의 이질적 민족에 의해 몰락했다.

타이족이 지배한후 앙코르의 크메르족은 자신들의 문화를 버렸다. 이민족의 침략에 지배 계급이 몰락하자 피지배자들은 고된 노동, 이질적 외래문화와의 단절을 더 바랬을 것이다. 더 이상 대규모 사원이나 궁궐을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외래종교인 대승불교 대신에 조용히 명상하고 부드러운 자신들의 소승불교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앙코르 문화는 민중들로부터도 잊혀졌다.

크메르인들은 자기 제국의 위엄 있는 문화보다는 타이족이 제공하는 문화에 빠져들었다. 나라를 잃으면 이토록 완벽하게 자기문화를 잊을수 있을까.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인들의 기억 속에 묻혀 졌다. 캄보디아라는 왕국은 400년후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인도차이나 경략 차원에서 복원되었고, 프랑스가 태국에서 씨엔립을 캄보디아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후 제국주의 역사학자, 인류학자, 문화운동가에 의해 앙코르의 유물들은 다시 인류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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