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르마크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다. 그는 볼가강에서 노략질을 하던 수적(水賊)이었고, 타타르족의 시비르 칸국과 싸워 패전한 장수에 불과했다. 그가 언제 태어나고 어떻게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다만 그의 전적은 미화되어 민중 전설로 구전되었고, 그 전설이 후대인에 의해 정사로 자리잡았다.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Yermak Timofeyevich)는 그보다 80여년 후에 활약한 스텐카 라친처럼 볼가강에서 러시아 상선을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고 이웃 나라를 침략해 재산을 훔치는 코사크 무리의 두목이었다. 그 시절, 코사크족은 자기 방어를 위해 무장하고 러시아와 폴란드,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간을 보다가 유리한 쪽에 붙었다. 코사크족은 하나의 국가체를 형성하지 못했으나 러시아와 타타르 칸국들, 오스만투르크, 페르시아의 변경 지역에 독자적인 무장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르마크의 무리도 여러 코사크 분파중 하나였다. 그의 휘하 병력은 500여명에 불과했다. 예르마크의 부대는 러시아 차르국에게서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의 휘하에 들어온 이반 콜조(Ivan Kolzo, 또는 콜트소)가 노가이 칸국의 수도를 급습했고, 노가이 칸국이 러시아 차르 이반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차르의 법정이 콜조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예르마크가 콜조를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러시아가 예르마크 집단을 적으로 규정했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예르마크가 차르의 사면을 조건으로 충성을 서약하고 시비르 칸국을 공격했다는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이 해석에는 반론도 있다. 예르마크가 시비르를 공격한 것은 사면에 대한 보답이라기보다 시비르 수도에 쌓여 있는 엄청난 금은보화, 특히 모피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대도(大盜)였다. 차르에 대한 충성, 그리스 정교에 대한 신념은 명분일뿐, 막대한 보물을 얻기 위해 시비르 정벌에 나섰다는 가설이 오히려 설득력을 갖는다.

 

 

예르마크의 무리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1570년대말경에 카마강 유역의 페름(Perm) 근처로 쫓겨가 있었다. 그는 시비르 칸국 주위를 정찰하다가 그곳 창고에 막대한 양의 모피가 쌓여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카마강 유역은 앞서 1558년 이반 4세가 스트로가노프 가문에게 하사한 곳이었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에서 예르마크에게 미끼를 던졌다. 시비르를 공격해 모피를 약탈해 오면 차르에게서 사면도 허락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공격에 필요한 총과 화승포, 병력도 지원하겠단다. 예르마크의 입장에선 손해볼 것이 없었다. 무기와 병력, 식량을 지원받고 차르국과 적대관계를 해소하면서 보물을 얻게 되니, 1석3조였다.

문제는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와 싸워 이겨야 하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예르마크는 스트로가노프가문에서 300여명을 지원받았다. 지원병은 러시아가 발트해 전쟁에서 잡은 포로로, 리투아니아인, 독일인, 타타르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예르마크의 병력은 총 840명, 적은 그보다 수십배나 많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예르마크의 출정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는데, 1582년 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예르마크는 병력수는 적었지만 압도적인 화력으로 숲 속의 종족들을 제압해 나갔다. 그해 10월 23일 이르티시 강의 추바시 케이프에서 추춤왕의 조카 마메트쿨(Mahmet-kul)이 이끄는 시비르 군대와 격돌했다. 전투는 3일간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예르마크의 부대는 300명을 잃었지만 승리를 거두고 시비르의 수도 카쉴릭(Qashliq)에 입성했다. 카쉴릭은 후에 러시아가 건설한 토볼스크와 가까이 있다.

수도의 곳간에는 엄청난 재물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모피, 비단, 금을 찾아내 나눠 가졌다. 하지만 식량이 없었다. 원주민들은 식량을 갖고 모두 도주했다. 겨울이 닥쳐 왔는데, 당장에 먹을 것이 없었다. 이웃의 우호적인 부족에게 식량을 얻어 근근히 겨울을 보냈다.

 

 

시비르 쿠춤칸의 조카 조카 마메트쿨이 남은 병력을 모아 예르마크를 공격했지만 패배해 포로로 잡혔다. 쿠춤칸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산악지대로 도주해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예르마크는 병력과 무기를 보충하기 위해 차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차르 정부에 사형언도를 받은 부하 콜조를 크레믈린궁으로 보냈다. 콜조는 최상급 모피를 잔뜩 가져가 차르에게 바쳤다. 그때 가져간 모피의 양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없다. 2,500~5,000장 사이라는 설과 60개 부대라는 설이 있다.

차르는 흡족해 했다. 마침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우울해 하던 차에 동방에서 웬만한 유럽국가보다 넓은 땅덩어리를 얻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이반 4세는 콜조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예르마크에게 ‘시베리아의 왕자’(Prince of Siberia)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갑옷을 선물했다. 이 갑옷은 엄청나게 무거웠는데, 결국 예르마크의 목숨을 빼앗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어쨌든 차르는 돈 한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거대한 영토를 얻게 된 것이다. 차르는 병력 500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군주가 약속한 병력은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가 시비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예르마크 부대가 전멸한 후였다.

 

차르는 포로로 잡힌 쿠춤칸의 조카 마메트쿨을 모스크바로 압송하라고 콜조에게 시달했다. 콜조의 보고를 받은 예르마크는 쿠춤칸과의 마지막 평화협상도 깨질 것을 우려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차르의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에 그는 마메트쿨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예르마크의 부대는 무기와 식량이 바닥난 상태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냈다. 부하들은 괴혈병으로 서서히 쓰러져갔다.

쿠춤칸이 예르마크측에 역정보를 흘렸다.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상인들이 막대한 양의 식량을 싣고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는 첩보였다. 굶주림에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그들에겐 그 첩보가 찬란한 신기루처럼 보였다. 그때가 1584년 8월초였다.

예르마크는 이슬람 대상을 잡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그 소문이 거짓이었음은 금새 드러났다. 대장은 곧바로 본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8월 4~5일 사이의 밤이었다. 예르마크의 일당은 배를 타고 이르티시강의 작은 섬에 도착했다. 그 섬에서는 쿠춤칸의 공격을 피할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쿠춤칸은 예르마크의 이동을 멀찌기서 감시하고 있었다. 타타르인들은 코사크부대가 어느 섬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는 기습공격을 가했다. 예르마크와 부하들은 총을 들 새도 없이 공격을 당했다. 많은 부하들이 죽었고, 예르마크는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상처를 입었다. 폭풍우가 불었다. 그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널 것을 시도했다. 일단 배에 올라탔다. 그는 차르가 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배가 풍랑을 만난데다 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예르마크는 몸무게를 이기지 못해 물에 빠졌다. 그가 그 무거운 갑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하지만 차르의 선물은 그를 수장시켰다. 한명이 간신이 건너가 그의 전사 소식을 전했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타타르족에게 발견되었는데, 차르에게서 선물받은 갑옷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예르마크의 시비르 칸국 공격은 실패로 종결되었다. 쿠춤칸은 수도 카쉴릭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했다.

예르마크의 실패는 차르의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반 4세는 더 이상 귀족의 개인사업에 시베리아 공략을 맡길수 없다고 판단하고, 제국의 군대를 직접 투입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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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Wikipedia, Conquest of the Khanate of Sibir

Wikipedia, Yermak Timofeyevich

모피로드, 윤성학, K북스, 2021

제국의 탄생, 피터 터친, 웅진지식하우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