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②…지증왕의 조카, 10대에 장수
이사부②…지증왕의 조카, 10대에 장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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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김씨…이름은 이사부, 태종, 이종, 이질부례지, 이사부지

 

신라 이사부(異斯夫) 장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 공식 역사서와 <화랑세기> 필사본(이하 <화랑세기>)에 간간히 남아있다. 금석문으로는 단양적성신라비에 이사부의 이름이 나온다. 이 자료들은 이사부의 역사적 활동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사부의 이름은 <삼국사기>에 이사부(異斯夫)와 태종(苔宗)으로, <삼국유사>에선 박이종(朴伊宗), <일본서기>에선 이질부례지(伊叱夫禮智)로 나오고, 단양적성비에선 이사부지(伊史夫智)로 포기되어 있다. 한사람의 이름이 이처럼 다양하게 표기되는 것은 한자가 정착되기 이전의 시기에 이두문과 한자식 표현이 혼재하면서 생긴 결과다.

이름의 어미 부()는 고위관직을 칭하는 이두문이고, 한자식 표현으로 마루 종()이다. 거칠부를 거칠 을 써서 황종(荒宗)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이종(伊宗)은 이두문과 한자의 뜻을 두로 섞은 표현. 태종(苔宗)이끼 태(’)의 한자의 음을 빌어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부는 이끼()+높은 분(), 이끼와 같은 분이라는 의미다. ‘이끼라는 어휘가 고대 신라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강인한 분’,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현대사학자들 가운데 이끼란 말이 싫었던지, ‘잇다, 계승하다라는 의미로 뛰어난 후계자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이사부의 성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김()과 박()으로 달리 쓰이고 있다.

이사부가 활동하던 6세기엔 성씨제도가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후대에 사람들이 부계와 모계를 혼동하면서 일연 스님이 이를 기록한 게 아닌가 싶다. 이사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가 풍부하고, 정확도가 높다는 점에서 성씨는 김씨로 보는게 옳고, 일연이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박제상(朴堤上)이라는 인물이 <삼국유사>에선 김제상(金堤上)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일본서기>에서 이사부 이름 뒤에 례지(禮智)’, 단양적성비에는 지()라는 어미가 붙는데, 두 어미 모두 존칭어미인 ’, ‘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픽 /김현민
그래픽 /김현민

 

<삼국사기>엔 이사부가 내물왕의 4대손이라고 했다.

<화랑세기>에선 이사부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라고 밝혔다. <화랑세기>는 또 아진종의 아버지를 습보공(習寶公)이라고 했다. <삼국유사>흥법조에도 아진종(阿珍宗)은 습보(習寶)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면 지증왕과 이사부의 아버지 아진종은 형제지간이 된다. 아진종이 습보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화랑세기><삼국유사>는 일치한다.

그런데 이사부의 할아버지가 되는 습보가 누구인가. <화랑세기>는 습보갈문왕이 내물왕의 손자라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내물왕은 이사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된다. 습보 갈문왕의 아버지는 파호(巴胡) 갈문왕으로 파악되고, 파호갈문왕은 눌지왕의 형제로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온 복호(卜好)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화랑세기><삼국유사> 등을 종합하면, 이사부의 계보는 내물왕 복호(파호) - 습보 아진종 이사부로 이어진다.

지증왕은 <삼국사기>에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사부는 지증왕의 조카가 된다.

 

이사부가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치 않다.

그에 대한 기록이 명확한 연도를 제시하며 나타난 것은 지증왕 6(505) 실직군주로 임명될 때이고, 마지막은 대가야를 함락한 진흥왕 23(562)이다. 이사부는 505년에서 562년까지 57년간 지증왕(신라 제22)에서 법흥왕(23), 진흥왕(24)3대에 걸쳐 활동한 것은 역사 기록상 확인된다.

실직군주로 임명된 때의 나이를 20세로 보면, 대가야 복속 때의 나이는 77세가 된다. 실직군주 임명시 나이를 20세로 잡는 것은 성년이 되는 해를 기준한 것이다. 화랑 사다함이 대가야 전투에 나이가 너무 어려 임금이 출전일 허락하지 않았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있다.

아무리 왕족(진골)이라 하더라도, 전략지역인 북방 영토의 통치자(軍主)로 부임할때는 성년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사부가 실직 군주에 부임할 때 20~30세는 됐을 것이다. 실직군주 부임시의 나이를 30세로 추측하면 대가야 공격시 87세가 되어 지나치게 고령의 나이에 전장에 나가므로,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실직 군주 부임시 나이를 20대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면 이사부가 태어난 해는 서기 484~486년쯤이고, 이때 신라 임금은 신라 21대 소지 마립간(또는 비처 마립간) 재위 시기가 된다.

정리하자면, 이사부는 소지 마립간 시기에 태어나서 20세에 실직 군주가 되고, 77세에 대가야를 정벌하게 된다. 그가 10대 후반에 가야를 공격한다는 기사가 있는데, 한평생을 전쟁터에 살며 신라의 영토 확장에 기여한 셈이다.

 

마희(馬戱)를 말위에서 하는 재주라고 해 마상재(馬上才)라고도 한다. 그림은 무예도보통지 좌우등리장신(左右登裏藏身), 18세기. /한국전통연희사전
마희(馬戱)를 말위에서 하는 재주라고 해 마상재(馬上才)라고도 한다. 그림은 무예도보통지 좌우등리장신(左右登裏藏身), 18세기. /한국전통연희사전

 

<삼국사기> 열전에 이사부가 실직군주가 되기 앞서 가야 공격에 성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도로왕(智度路王, 지증왕)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居道)의 계략을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加耶)[혹은 가라(加羅)]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열전 이사부조)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가기 앞서 지증왕 초기에 변경의 관리가 되어 세운 기록이 있다. 그 변경은 가야와 맞닿아 있는 어디쯤일 것이다.

시기는 지증왕 초기. 지증왕 원년에서 실직군주가 된 6년의 사이, 500~505년 사이였다. 실직 군주로 부임할 때 나이를 20대 초반으로 치면, 가야 접경지대 군 사령관으로 갔을 때 나이는 10대 후반이었다. 이사부는 어린 나이에 군인의 길을 걸었다. 왕족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사부는 위계(僞計)의 전술로 가야를 공격해 땅을 빼앗았다. 전술은 거도(居道)의 계략이었다.

거도는 탈해왕때 사람이다.

이사부는 거도의 전술을 연구해 그 방법을 채택하기로 했다. 우선 들판에 군사들을 모아놓고 말놀이를 즐겼다. 이사부 군대는 말을 훈련시키고, 재주를 부리는 놀이에 열중했고, 가야를 공격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줬다.

가야는 이사부의 마희(馬戲) 작전에 속았다. 마희는 말 위에서 펼치는 여러 가지 곡예를 말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를 하거나 온갖 동물들 흉내를 내고, 공중에 물건을 던져 받거나 말들에 엎드리는 재주를 부린다. 가야 병사들이 그 놀이에 빠져 구경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장한 기병들이 본거지를 급습했다. 가야 병사들은 넉 놓고 구경을 하다가 혼비백산하고 도망을 쳤을 것이다. 가야는 굴복하고 땅을 내주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속임수 전략이다.

이사부가 10대에 전과를 올린 가야 지역이 어느 곳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경남 합천의 다라국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전덕재 교수(단국대)이사부 가계와 정치적 위상에서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위치한 옥전고분의 부장 유물의 변화상을 관찰하면서, 그 곳이 이사부가 거도의 계략으로 침공한 지역으로 추정했다. 이 일대는 가야의 소국인 녹국(㖨國, 또는 다라국)이 지배하던 곳으로 비정된다. 5세기 대가야가 녹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지만, 6세기초에 어린 나이의 이사부의 반격으로 녹국은 신라의 통제 아래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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