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츠, 북극항로 실패했지만 신용사회 개척
바렌츠, 북극항로 실패했지만 신용사회 개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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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해에서 극한 겨울 보내며 고객 위탁물 보호…네덜란드 무역에 신뢰 심어

 

16세기초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열었지만, 그 길은 멀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했고, 1521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일주한 해로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지나야 했다.

조금더 빠른 길이 없을까. 북극 바다를 지나면 아프리카의 희망봉이나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지 않고 빠르게 아시아에 도달할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북극 항로는 유럽에서 시베리아 북쪽으로 지나 동쪽 베링 해협까지 가는 북동항로와 유럽에서 북아메리카 대륙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가는 북서항로로 나뉜다.

런던에서 이 뱃길을 거치면 12,800이지만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23,600이다. 파나마 운하는 생각하지도 못한 시절이었으므로 이 항로는 꿈같은 항로였다.

유럽인들의 북극항로 개척은 대항해시대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497년 잉글랜드 왕 헨리 7세가 존 캐벗에게 북서 항로를 찾으라고 명한 것이 처음이다. 그 뒤 자크 카르티에(1534) 마틴 프로비셔(1576) 프랜시스 드레이크(1578) 존 데이비스(1585)가 대서양, 혹은 태평양 쪽에서 북극해를 지나는 뱃길을 찾다가 모두 실패했다.

 

북극항로와 수에즈 항로 /위키피디아
북극항로와 수에즈 항로 /위키피디아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비해 신대륙과 대양 항로 개척에 뒤늦은 네덜란드는 북극 항로에 논독을 들였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네덜란드 항해가이자 지리학자인 빌렘 바렌츠(Willem Barentsz, 1550~1597)였다.

빌렘 바렌츠 /위키피디아
빌렘 바렌츠 /위키피디아

 

바렌츠는 1594, 1595, 1596년 세 차례에 걸쳐 북극항로 개척에 나섰다. 그는 북극해가 24시간 햇볕이 내리 쬐기 때문에 바다가 얼어 있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시베리아 북쪽의 바다를 항해하면 인도로 갈수 있다고 믿었다.

첫 번째 탐험은 15946월에 시작되었다. 3척의 배는 네덜란드를 출발해 노르웨이를 지나 시베리아 북쪽 카라해(Kara Sea)로 들어갔다. 7, 그들은 북극곰을 만나 쏘아 죽였다. 저 곰을 암스테르담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곰 한 마리를 생포해 배에 실었다. 하지만 배에 갇힌 곰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총살해야 했다. 일행은 노바야젬랴(Novaya Zemlya) 섬 서쪽 해안에서 커다란 빙산에 막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탐험은 네덜란드 왕족 오렌지 공작이 적극 추진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공작은 바렌츠의 1차 탐험에 흥분해 자금을 대며 배에 물건을 가득 실어 중국에 가서 교역하고 오라고 했다. 6척의 배로 구성된 탐험대는 우랄산맥 북쪽에 사는 원주민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카라해에서 예상치 못한 추위를 만나 되돌아가야 했다. 두 번의 항해 모두 노바야젬랴 섬을 넘어서지 못했다.

두 번째 항해가 실패하자 네덜란드 국가수반은 더 이상 북극항로 개척에 정부 지원이 없다고 못 박았다. 다만, 북극항로를 개척한 자에게는 엄청난 보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이번엔 암스테르담 상공인들이 돈을 대서 배 2척을 구입해 바렌츠를 탐험대장으로 임명했다.

 

북극 빙하에 갇힌 바렌츠의 배 /위키피디아
북극 빙하에 갇힌 바렌츠의 배 /위키피디아

 

15966월에 출발한 3차 원정에서 바렌츠는 노르웨이 북부에서 동쪽으로 돌지 않고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스피츠베르겐 섬을 발견했다. 이 섬의 해안을 따라 올라가니 얼음덩어리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항해해 노바야젬랴 섬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앞서 두 번의 항해에서 이 섬의 북쪽을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다른 배를 이끌던 얀 라이프(Jan Rijp) 선장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노바야젬랴의 남쪽을 돌았다. 둘은 갈라서 다른 길을 항해하기로 했다.

바렌츠는 노바야젬랴 섬 북쪽을 돌아 나아갔지만,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에 갇히게 되었다. 선원수는 16, 심부름하는 소년 사환까지 모두 17명이었다.

 

빌렘 바렌츠 일행의 오두막집 /위키피디아
빌렘 바렌츠 일행의 오두막집 /위키피디아

 

움직일수 없게 된 바렌츠 일행은 배에서 내려 섬에 상륙해,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지었다. 식량은 배에서 날라 왔다. 식량이 모자랄지도 몰라 그들은 북극여우를 사냥해 고기를 보충했다. 물은 얼음을 녹여서 해결했다.

북극해의 겨울은 살인적이었다. 북위 75°가 넘는 곳에서 바렌츠 일행은 오두막에서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난로 앞에 바짝 다가앉아 있어도 등에 서리가 하얗게 덮였다. 난로에 발을 올려 놓으면 양말이 탔지만, 발은 데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돌을 달구어 등을 녹이면서 정말 용케도 2명만 빼고 살아 남았다. 사환도 죽었다.

그들은 기나긴 겨울을 보냈다. 봄이 왔지만, 배는 부서져 항해를 할수 없었다. 이듬해 6월이 다가왔는데도 얼음이 녹지 않아 배는 움직이지 못했다.

1573613일 살아남은 자들은 두 대의 구명보트에 올라타고 갇혀 있던 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바야 젬랴를 탈출한지 1주일 때 되던 620일 바렌츠튼 끝내 운명을 다했다. 영양 부족으로 쇠약해진 바렌츠는 이름도 없는 한 얼음 섬에서 눈을 감았다. 나머지 선원들은 식량을 바다에 잃고 몇 주일을 추위와 굶주림과 괴혈병에 시달리다 러시아 어부들을 만나 식량을 구했다. 그 뒤로 그들은 1,000km 가까운 거리를 노를 저어 무르만스크 근처 콜라 반도에 있는 한 대피소에 이르러, 네덜란드 구조대를 만났다. 그 구조대의 선장은 3차 항해을 떠나 다른 길로 떠난 얀 라이프(Jan Rijp)였다.

 

바렌츠가 위탁받아 무역거래를 하려던 물건들 /위키피디아
바렌츠가 위탁받아 무역거래를 하려던 물건들 /위키피디아

 

빌렘 바렌츠는 북극항로 개척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무역거래에 신뢰라는 것을 안겨주었다.

바렌츠 일행은 빙하에 갇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8개월을 버텼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선원들이 죽어 가는데도 바렌츠는 고객들의 화물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부하 선원들은 선장의 명령을 따랐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고객의 화물을 더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소문으로 네덜란드 배의 수요가 폭증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양무역대국으로 성장하며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 네덜란드는 바렌츠가 보여준 신뢰를 토대로 성공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상설시장과 거래소를 열었고, 영국보다 먼저 자본주의를 꽃피웠다.

 

바렌츠 일행이 겨울을 보낸 나무오두막집은 170년이 지난 1871년에 노르웨이 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오두막집에서 발견된 지도에는 그들이 지난 뱃길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고, 기상학 자료들이 꼼꼼히 수집되어 남겨져 있었다.

그후 헨리 허드슨(1607), 세멘 데즈네프(1648) 등이 바렌츠가 만든 해도와 기상 자료를 토대로 북극 항해에 나섰다.

북동 항로는 바렌츠가 죽은 뒤 280여 년이 지난 1879년 스웨덴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돌프 에리크 노르덴시욀드가 처음 개척했다. 그후 1920년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북동 항로 두 번째로 통과했다.

바렌츠 일행이 1596~1597년 겨울을 보낸 바다를 바렌츠 해(Barents Sea)라고 명명되었다. 최근 러시아가 북극항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의 노력이라기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 바다가 녹았기 때문이다. 바렌츠의 시대는 소빙하기(Little Ice Age)였다.

 

바렌츠 해 /위키피디아
바렌츠 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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