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로 받은 야삭…탐욕의 땅 시베리아
모피로 받은 야삭…탐욕의 땅 시베리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6.30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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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가들, 모피 찾아 시베리아행…차르정부는 원주민에게 공물 요구

 

지금부터 400년전인 1623, 시베리아산 검은 여우모피 한 장 값이 토지 50에이커, 멋진 별장 한 채, 5, 10마리, 20마리를 주고도 돈이 남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우와 담비 모피는 황금이나 다름 없었다. 시베리아 모피는 검은 황금이라고도 하고 보드라운 황금’(soft gold)라고도 했다.

러시아 농노 한 가족 네명이 1년간 1루블을 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모피 한 장이 40~50루블 했으니, 애써 농사 지을 필요가 없는 풍조를 만들었다.

1598년 시베리아로 가는 길을 막았던 시비르 칸국이 차르군에 멸망했다. 막힌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냉대 침엽수림의 타이가 지대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원주민은 소총으로 무장한 러시아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무주공산이었다. 서유럽인은 시베리아에 관심이 없었고, 중국인도 추운 땅은 오지 않았다. 겨울엔 추위, 여름엔 늪지대와 모기라는 자연을 극복하는 것만이 남았다.

 

러시아 이르비트의 모피시장 /위키피디아
러시아 이르비트의 모피시장 /위키피디아

 

모피라는 황금은 차르는 물론 귀족, 상인, 심지어 평범한 농민까지 눈을 멀게 했다. 탐욕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 본성을 자극했다. 사회에서 이탈한 부랑배와 범죄자, 지배계급의 수탈에 저항하는 농노, 한계상황에 처해 있는 무리들에게 시베리아라는 갈곳이 생겼다. 새로운 황금은 그들에게 희망이었고, 꿈이었다.

모험가들이 개별적으로 시베리아에 들어갔다. 자유인들은 혼자 떠나거나 몇몇이 무리를 지어 담비와 여우를 찾아 시베리아로 향했다. 원주민들은 들짐승을 잡아 장갑이나 모자. 신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쓴 짐승 가죽이면 한평생 먹고살수 있다.

시베리아산 모피를 구하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러시아 사냥꾼이 직접 검은 털이 덮인 동물을 잡는 것이며, 둘째는 원주민이 잡은 것을 사는 방법이다.

탐욕가들은 악천후를 이겨내기 위해 숲속에 함께 모여 캠프촌을 형성했다. 그들은 덫을 놓는 사람, 원주민에게 술을 주고 모피를 사는 사람, 탐험을 하는 사람, 유물을 찾는 사람 등 다양한 인간들로 구성되었다. 17세기초 매년 1천여명이 개별적으로 시베리아로 들어갔다고 한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자기네가 쓸 것 이외에는 작은 짐승들을 잡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이 몰려오면서 작고 검은 털짐승이 값나가는 동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 동물들은 순록을 유목하며 살던 타이거인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왔다.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에게 야삭을 바치는 시베리아 원주민들 /위키피디아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에게 야삭을 바치는 시베리아 원주민들 /위키피디아

 

러시아 사냥꾼들이 생산한 모피는 흠이 많았다. 야생동물을 포획하는 기술이 서툴러 모피에 칼이나 화살 자국이 있었다. 자국이 있는 모피는 하등급으로 떨어진다. 원주민들이 잡은 모피가 우수했다. 원주민들은 현지 기후와 지형에도 익숙했다. 모피 수요가 팽창하면서 유럽 러시아에서 달려간 사냥꾼보다 원주민이 생산한 모피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아시아계 원주민들은 그동안 유럽인들과 접촉이 없었다. 수천년동안 만나지 못했던 유럽 족속과 아시아 족속 사이에 접점이 생겼다. 바로 모피였다. 우월한 입장에 있는 족속은 유럽출신 러시아인이었고, 아시아계 퉁구스족은 피지배자였다. 백인들에겐 무기가 있었고, 차르국이란 권력공동체가 뒷배를 보아주었다.

가장 수월한 모피 수집은 검은 짐승을 잘 잡는 원주민들에게 모피 조달을 강제하는 방법이었다. 차르는 야삭(Yasak(이란 제도를 도입했다.

야삭은 몽골이 동유럽을 지배할 때 피지배족에게 요구한 동양식 조공의 변형이었다. 몽골의 칸은 조공을 바친 댓가로 피지배족을 보호했다. 시대가 흘러 약자가 강자가 되고 강자가 역자가 되면서 러시아는 한때 그들의 지배자였던 타타르에게서 야삭을 받게 되었다. 차르는 카잔칸국, 아스트라칸국에 야삭을 요구했고, 그 방식을 시베리아 원주민에게도 적용했다.

일종의 세금이었다. 러시아는 원주민들에게 칸에게 내던 세금을 차르에게 내라고 했다. 야삭은 개인 또는 부족에게 요구되었고, 때론 개인과 부족에 동시에 요구되기도 했다. 조공물은 담비 모피였다. 납세자는 18세에서 50세에 이르는 성인 남자였으며, 할당량은 1인당 모피 5~22장으로 진폭이 컸다. 모피가 잘 잡히는 시기엔 많이 걷었고, 개체가 줄었을 땐 조금 걷었다. 17세기 후반 담비가 고갈되었을 땐 1인당 3장을 받기도 했다.

야삭을 할당량보다 적게 내거나 납부를 거부하는 개인 또는 부족에게는 처벌이 가해졌다. 이에 비해 모피를 잘 바치는 원주민에게는 술과 담배 등 기호품과 칼, 도끼, 남비 등 생활용품이 하사되었다.

야삭 징수자들은 차르에 상납하는 야삭 이외에 개인적 선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선물은 자신의 것으로, 개인적 치부에 이용되었다. 이 징수자 계층에 우크라이나와 볼가강 유역을 떠돌던 코사크가 대거 가담했다. 이 떠돌이 무장집단은 시베리아 퉁그스족을 착취하는 차르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차르는 새로 개척한 지역에 보예보다(voyevoda)를 파견했다. 일종의 총독이다. 그들은 차르를 대신해 지역을 통치하고 야삭을 걷었다. 보예보다와 세금징수원은 차르에 바치는 모피량보다 배나 뜯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에겐 폭력이 가해졌다.

표트르 대제 재위기간에 가가린이란 자는 토볼스크의 보예보다를 9년이나 역임했다. 그는 토호처럼 군림했다. 방화범을 산채로 화형시키고, 자기 얼굴을 새긴 동전을 발행했다. 부정축재한 돈으로 은제 말발굽을 만들어 자신의 말에 박아 넣었고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마리아상을 침대 곁에 두었다. 차르가 그 사실을 알고 격노해 그를 교수형에 처했다.

 

시베리아산 담비 코트 /위키피디아
시베리아산 담비 코트 /위키피디아

 

모피의 집산지는 서쪽엔 토볼스크, 동쪽은 이르쿠츠크였고, 그 중간에 톰스크가 끼어 있었다. 차르정부는 러시아에서 모피를 인위적으로 낮춰 거래했다. 예를 들어 이르쿠츠쿠에서 108 루블하는 1등급 여우 모피가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선 4,779 루블에 팔렸다. 그 차액을 차르 정부가 먹었던 것이다.

차르 정부는 모피 거래에서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17세기에 시베리아산 모피 거래액이 35만 루블에 이르렀는데, 이는 러시아 재정수입의 10분의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 좋은 수입을 차르가 놓칠리 없다. 차르는 탐험대를 조직해 시베리아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모피공급엔 한계가 있었다. 모피 수요가 팽창할수록 담비도 따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다. 토볼스크 인근의 모피는 금새 바닥이 났고, 톰스크도 거래량이 급감했다. 이르쿠츠크에 새 모피시장이 열렸다. 그 기간이 3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빠른 속도로 개척한 것은 모피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은 생태계 파괴를 동반하며 빠르게 진행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모피 조달지를 찾아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1605년에 예니세이강에 이르렀고, 이어 1639년에 태평양 연안에 도착했다. 시비르 왕국이 무너진지 40여년만에 차르국은 시베리아를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Siberian fur trade

Wikipedia, Yasak

모피로드, 윤성학, K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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