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의 추억, 콜리마강
수용소군도의 추억, 콜리마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06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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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금이 발견되면서 강제노동수용소 설립…흐루쇼프 때 해체

 

콜리마강(Kolyma river)은 길이 2,129 km, 유역면적 64.7, 시베리아 북동부를 흐르는 강이다. 콜리마산맥에서 발원해 사하공화국, 추코트카자치구, 마가단주를 흘러 북극해로 빠져나간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강으로 알려져 있다. 겨울철 평균 기온이 19~-38°C에 이르고, 여름에 3~16도를 오르내린다. 연중 250일 동안 수 m나 얼어 있고, 6월에 녹지만 9월이면 얼기 시작한다.

이 강에 대한 탐험은 오래 되었다. 1640년대에 코사크 탐험가들이 인디기르카, 알라제야를 거쳐 콜리마에 이르렀다. 코사크들은 축치족에게서 야삭(공물 또는 세금)을 걷어 야쿠츠크의 보예보다에 상납했다.

 

콜리마강 유역 /위키피디아
콜리마강 유역 /위키피디아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콜리마강이 모스크바의 관심을 끈 것은 그곳 얼음장 밑에 황금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콜리마 일대엔 금과 은, 백금, 아연, 수은, 구리, 안티몬, 석탄, 토탄 등 지하자원은 물론, 최근엔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콜리마강에 금과 백금이 발견된 것은 20세기초였다. 자본주의 세계였다면 황금에 눈이 어두운 한탕주의자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들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러시아엔 세계 최초로 공산혁명이 성공했다. 누구나 평등하고, 누구나 부를 동등하게 나눠 갖는 사회에서 1년중 절반 이상 얼어붙어 있는 땅으로 금을 캐러가려 하지 않았다. 혁명초기에 가진 자들이 돈을 숨기는 바람에 소비에트 정부는 경제건설 자금이 부족했다. 레닌에 이어 권력을 독점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콜리마의 금에 눈독을 들였다. 저 금을 가져다 경제개발 자금으로 써야겠다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물론 좋은 발상이다. 그런데 누가 그 추운 곳에 금을 캐러 간다는 것인가.

스탈린은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았다.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해 얼음의 나라로 추방해 노동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강제노동수용소였고, 이를 굴락(Gulag)이라 했다. 지주, 자본가, 귀족계급을 아우르는 반동분자(Kulak)와 토지를 집단화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소농들도 굴락에 수용했다. 스탈린의 입장에선 일석이조였다. 토지집단화도 성공하고 시베리아를 개척할 인력도 충당할수 있었다.

 

콜리마 금광에서 노역하는 죄수들 /위키피디아
콜리마 금광에서 노역하는 죄수들 /위키피디아

 

1928~1929년에 콜리마강에 금 채굴이 시작되었다. 소련정권은 1931년 븍극권개발위원회를 만들어 달스트로이(Dalstroy)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콜리마강 유역엔 80개의 굴락 캠프, 즉 강제노동수용소가 만들어졌다. 달스트로이의 관할지역은 300, 한반도의 15배나 되었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정권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달스트로이 관할 죄수의 숫자는 가장 많았던 1952년에 20만명에 달했다.

죄수들은 주로 유럽 러시아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밀경찰(체카)에 체포되어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수송되었다. 죄수들은 하바로프스크 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아무르강과 오호츠크해를 지나 마가단에 도착했다. 마가단(Magadan)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콜리마로 가려면 산맥을 넘거나 여름철에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마가단은 경유지였다. 생존한 수용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시베리아 열차에서 내려 블라디토크 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배를 타는 순간부터 최수들은 도망칠수 없는 외로운 섬에 갇힌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The Gulag Archipelago)라고 했다.

수천명이 죄수 수송선에서 사망했다. 생존자의 회고에 따르면 죄수를 실은 수송선이 1933년 초가을에 콜리마강이 얼어붙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했다. 배는 다음해 여름에야 움직였다. 배에는 선원과 경비병만 남았고, 타고 있던 죄수들은 모두 실종되었다.

초대 달스트로이 책임자는 에두아르드 베르진(Eduard Berzin)이었다. 스탈린은 콜리마 수용소의 가혹함에 대한 책임을 베르진에 떠넘겨 버렸다. 베르진은 1937년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마가단을 일본에 넘겨주려 했다는 혐의였다.

 

콜리마 대로 건설에 투입된 죄수들 /위키피디아
콜리마 대로 건설에 투입된 죄수들 /위키피디아

 

바를람 샬라모프는 콜리마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회고록 콜리마 이야기’(1954)에서 이렇게 썼다.

보고서 - 여섯 시간 작업 지연에 대한 해명서를 제출하라는 소장님의 지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아침 기온은 영하 50도 이하였습니다. 보고드린 대로 우리 온도계는 당직 감독관에 의해 고장 났습니다. 그러나 뱉은 침이 공중에서 얼어붙었기 때문에 온도 측정은 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반은 정시에 데리고 나갔으나 우리 구역에 공급되어 동토를 녹이는 보일러의 인젝토르(급수용 분사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작업에 착수할 수 없었습니다. 인젝토르의 작동 불량에 대해서는 주임 기사에게 수차례 통보했으나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아 인젝토르는 완전히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인젝토르는 이미 5일 동안 형편없이 작동하고 있는데, 사실 구역 전체의 계획 수행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인젝토르를 잘 다루지 못하고, 주임 기사는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흙 몇 세제곱미터를 요구할 뿐입니다.

이상. ‘황금샘구역장 광산 기사, L. 쿠디노프.”

다음은 보고서에 정확한 필체로 비스듬히 쓴 것이다.

1) 5일간 작업 거부로 구역의 생산 중단과 지연을 야기한 수인 인젝토르를 3일간 작업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감금했다가 징벌 중대에 수용할 것. 이 건은 수인 인젝토르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조사 기관에 넘길 것.

2) 주임 기사 고레프에게 생산 현장의 규율 부재를 경고함. 수인 인젝토르는 자유노동자로 교체하도록 제안함.

광산 소장 알렉산드르 코롤레프

 

콜리마 대로 /위키피디아
콜리마 대로 /위키피디아

 

콜리마 수용소의 사령부 달스트로이는 1932년 마가단에서 콜리마강을 잇는 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콜리마 대로(R504 Kolyma Highway)는 영구 동토층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깊이 파야 했고, 작업이 고됐다. 수많은 죄수들이 동원되어 죽어 나갔다. 스탈린이 죽어야 강제노동이 중단되었다. 1953년까지 도로공사는 20년간 진행되었다. 죽은 사람은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렸다.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가 없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 도로를 뼈의 도로’(Road of Bones)라고 부른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후 1596년 콜리마 수용자들에게 총사면령을 내렸다. 1930년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콜리마 유역에서 25~100만명의 수용자들이 죽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강제노동소가 해체된 이후 콜리마 유역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Kolyma (river)

Wikipedia, Kolyma

Wikipedia, Magadan

Wikipedia, SS Dzhurma

Wikipedia, R504 Kolyma Highway

Wikipedia, Dalst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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