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호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0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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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년 코사크 첫 텀험…아시아 유목민족의 호수가 러시아 영토로

 

바이칼호는 중국 역사에도 자주 나오는 호수다.

한 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에 사절로 파견된 소무(蘇武)가 흉노의 투항 요구를 거부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유배간 곳이 북해(北海)였고, 그곳이 바이칼 호수다. 그의 친구 이릉(李陵)도 바이칼호 주변에서 양치기를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소무를 찾아간 스토리가 유명하다.

바이칼호(Lake Baikal)는 고대 이래 흉노, 돌궐, 몽골 등 아시아 유목민족의 터전이었다. 중국사에선 바이칼을 한해(翰海) 또는 북해라고 불렀다. 바이칼을 우리민족의 시원으로 보는 고대학자들도 있다. 겨울에 우리나라로 내려오는 철새들의 여름 고향이기도 하다.

 

바이칼호 올혼 섬 /위키피디아
바이칼호 올혼 섬 /위키피디아

 

서양인으로 처음 바이칼에 도착한 사람은 코사크 탐험가 쿠르바트 이바노프(Kurbat Ivanov). 그는 예니세이강을 탐험하다가 강의 남쪽 어딘가에 큰 호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1643621일 이바노프는 74명의 대원을 이끌고 예니세이강의 지류인 앙가라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갔다. 지리를 잘 아는 퉁구스족 부족장이 동행했다. 탐험대는 앙가라강 상류에서 프리모르스키 산을 넘어 바이칼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배를 만들어 올혼(Olkhon)섬에 상륙했다.

이바노프는 대원의 절반인 36명을 세묜 스코로호도프(Semyon Skorokhodov)에게 주어 바이칼 서해안을 탐사하도록 했다. 스코로호도프의 분대는 또다른 퉁구스족 부족장의 안내를 받아 앙가라강과 바이칼이 만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겨울이 다가오자 월동 캠프를 설치하고 현지 부족에게서 야삭(공물)을 받았다. 하지만 스코로호도프 일행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겨울이 엄혹한데다 식량이 떨어졌다. 바이칼의 겨울 평균기온은 -19°C. 그들은 예니세이강의 본거지 베르홀렌스키 요새로 돌아가는 도중에 현지부족의 공격을 받았다. 아마 몽골족의 일파인 브리야트족(Buryats)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12명만 살아서 돌아갔다.

한편 이바노프는 원래 온 길을 되돌아와 무사하게 출발지로 돌아갔다. 그는 탐험기에서 바이칼호에는 물고기가 풍부하고 모피를 가진 동물들이 가득하다고 서술했다.

 

이바노프의 탐험은 추가 탐험을 촉발했다. 이듬해인 1644년 이반 포하보프(Ivan Pokhabov)를 리더로 하는 탐험대가 앙가라강을 통해 바이칼호수로 접근하는 길을 찾아냈다. 앙가라강의 유속이 빨랐기 때문에 그들은 바이칼로 접근하는데 고생했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몽골 고원에서 발원한 셀렝게강(Selenge_River) 입구를 찾아냈다. 포하보프는 끈질긴 탐험 끝에 1647년에 울란바타르(지금 몽골의 수도) 근처에서 몽골족 부족장 체첸칸(Tsetsen Khan)을 접견하기도 했다.

바이칼 호수에서 빠져나가는 강은 앙가라강이 유일하다. 앙가라강 입구엔 담비 서식지로 유명했다. 사냥꾼들이 몰려오고, 모피 시장이 형성되었다. 동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인 이르쿠츠크(Irkutsk)가 형성되었다.

 

초기 시베리아 철도 바이칼호 구간을 연결한 트레인 페리선 /위키피디아
초기 시베리아 철도 바이칼호 구간을 연결한 트레인 페리선 /위키피디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처음 건설했을 때는 바이칼호수 위로 철도를 운행했다. 바이칼호 남쪽의 지형이 매우 험악해서 당시 기술로는 철도를 놓기 어려웠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여름에는 열차 페리를 이용하고 겨울에는 아예 얼음 위에 임시 철도를 놓아서 운행했다. 호수 남단에 철도를 건설한 이후에는 중단되었다.

 

러시아 내전 때 백군과 귀족들이 얼어붙은 바이칼호를 건너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 동사한 사건이 있었다. 19202월 백군과 그 가족들이 바이칼 호반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30만명 정도였다. 이들은 남쪽 몽골로 내려가면 살아남을 것이라 판단했다. 바이칼호는 1월부터 3월까지 결빙기다. 당시 호수 표면에는 3m 두께의 얼음이 얼어 있었다.

허허벌판 바이칼 호수는 조금도 바람막이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왔다. 병사와 피난민들이 시베리아 폭풍한설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 죽었다. 이들의 시체는 겨울 동안 바이칼 호 위에 그대로 동상처럼 남아 있었다. 봄이 와 얼음이 녹으면서 동사한 시체들과 그들이 가져간 보물들도 함께 1,600m 호수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인공위성 사진(오른쪽이 바이칼호, 왼쪽이 후브스굴호. /위키피디아
인공위성 사진(오른쪽이 바이칼호, 왼쪽이 후브스굴호. /위키피디아

 

바이칼은 몽골어로 풍요를 뜻하는 바이’(bai)와 호수를 뜻하는 ’(kal)의 합성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의 진주로 사랑한다.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표가 갈라지면서 생긴 호수다. 바이칼의 서쪽에 후브스굴 호수(Lake Khövsgöl)도 같은 지질변화로 생겨 두 호수를 자매호수라고 부른다. 바이칼은 러시아, 후브스굴은 몽골 영토다.

 

바이칼 바다표범 /위키피디아
바이칼 바다표범 /위키피디아

 

바이칼호는 여러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우선 세계 최대 담수호(淡水湖). 지구표면 담수의 25~30%를 이 호수가 저장하고 있다. 미국 오대호의 물을 모두 합쳐도 이 호수를 따라기지 못한다. 또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다. 수심이 1,742m에 이른다. 또 저장된 물이 2,500만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면적은 31,500로 대한민국의 3분의1에 해당하고, 벨기에보다 넓다. 세계에서 7번째로 큰 호수다. 남북 길이 636km, 최장 너비 79km, 최단 너비 27km이며, 둘레는 2,200km에 이른다. 수심이 깊을 뿐 아니라 물도 맑아서 겨울철 물밑 가시거리가 최고 40.5m에 달한다.

330여 개의 강이 이곳으로 흘러 드는데, 가장 큰 강이 셀렝게 강이다. 밖으로 나가는 수로는 앙가라(Angara)강 하나뿐이다. 앙가라강은 예니세이강은 예니세이강과 합류한다.

호수 안에는 총 22개의 섬이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 72km인 올혼섬이다. 이 섬은 호수내에 위치한 섬으로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크다.

바이칼호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독특한 담수 동식물군을 보유하고 있다. 식물이 1,080여 종, 동물은 1,550여 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은 이곳에만 있는 고유종이다. 대표적인 포유류가 바이칼바다표범이다. 이외에도 담비, 수달, 시베리아 족제비, 고라니, 흰꼬리수리, 새매부엉이 등 다양한 희귀동식물이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Lake Baikal

Wikipedia, Kurbat Iva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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