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오가며 갈라진 몽골 칼미크족의 사연
동서양 오가며 갈라진 몽골 칼미크족의 사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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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강 하류로 갔다가 러시아에 반발, 중국 돌아가…이동 과정에서 종족 분리

 

17세기, 러시아차르국이 코사크를 앞세워 시베리아로 동진하고 있을 때, 중국에선 청나라가 서진했다. 중원을 제압한 청나라는 세력을 확장하던 오이라트와 부딛치게 되었다. 오이라트는 몽골족의 일파로 중국의 신장(新疆), 외몽골,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남부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

오이라트(Oirats)는 준가르, 두르버트, 토르구트, 허수트 등 네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네 부족 중 준가르 부족이 가장 강력해 두르버트와 허수트를 복속시켰다. 톈산산맥 북쪽에 살고 있던 토르구트 부족(Torghuts)17세기초에 고향을 떠나 수천km 떨어진 중앙아시아와 볼가강 하류로 이주해 러시아 차르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으로 이주했다. (토르구트(土爾扈特)는 투르후트로 표기하기도 한다.)

 

역사가들의 추적에 따르면, 토르구트는 1603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히바 칸국과 부하라 칸국을 공격했다. 이어 1607년 카자흐 칸국(카자흐스탄)을 공격했으나 카자흐의 에심 술탄의 강력한 방어로 서부 카자흐스탄 지역을 빼앗는데 그쳤다.

1614년 토르구트족은 러시아 토볼스크의 보예보다에게 차르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군사력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몽골족은 분열되어 있었다. 몽골의 주류인 할하족이 청나라에 복속해 오이라트를 공격했다. 오이라트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와 그 앞잡이 할하족과 대항하려 한 것이다. 당시 시베리아의 사령부 역할을 했던 토볼스크 보예보다는 오이라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원을 시도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선 북유럽과의 전쟁에서 국력이 쇠약해져 있다는 이유로 전선의 확대를 꺼려했고, 결국 오이라트의 요구를 거부했다.

 

토르구트족(칼미크족)의 분포 /위키피디아
토르구트족(칼미크족)의 분포 /위키피디아

 

러시아와의 동맹이 깨진 후 토르구트는 서진을 계속했다. 1619년 코카서스 북부 카스피해 서안의 다게스탄 일대를 공격하고 노가이 칸국을 밀어냈다. 노가이 칸국 사람들은 흑해 일대에 세력을 펼치던 크림 칸국으로 쫓겨갔다. 당시 크림 칸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다.

오이라트족은 티베트 불교, 즉 라마교를 믿고 있었고, 토르구트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의 차르는 몽골족 일파가 변경지대로 들어와 적대세력인 아시아계 타타르족을 공격하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차르는 어느날 갑자기 스텝지역에 들어온 저 세력을 이용하자고 판단했다. 코사크를 시베리아 정벌에 활용한 것처럼 토르후트를 무슬림 제압에 앞세우자는 것이었다. 토르후트는 유목민족으로 기병 운용이 뛰어났다.

1640년 오이라트 부족회의가 중국 국경밖 카자흐스탄의 타르바가타이에서 열렸다. 각 부족은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하는데 실패했고, 토르구트 부족은 코카서스 북부 볼가강 하류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했다. 이 무렵 차르가 동맹을 제의했다. 토르구트는 차르의 용병 역할을 맡았다.

토르구트는 코카서스 서북부 일대에 유목지를 보유하고 칸국이란 지위를 갖는 조건을 러시아 차르로부터 보장받았다. 러시아는 불교 부족인 토르구트 영토를 이슬람 세력 사이에 완충지로 활용했다. 러시아는 토르구트에 무기와 식량을 주어 페르시아, 오스만투르크, 크림칸국, 쿠반칸국, 노가이칸국의 이슬람 국가를 공격하는데 앞세웠다.

토르구트는 코카서스 북서쪽에 칼미크 칸국(Kalmyk Khanate)을 세웠다. 오이라트, 토르구트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칼미크가 된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에게서 이름을 차용했다는 설도 있다.

칼미크 칸국은 중국 북서부에서 청나라와 기나긴 전쟁을 벌이는 준가르 칸국과는 거리를 두었다. 준가르는 같은 오이라트족의 나라였지만, 부족이 달랐고, 지리적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칼미크는 차르국에 신속(臣屬)했지만 독립적인 칸국의 대우를 받았다. 칼미크가 정착하면서 러시아와 이해가 충돌하는 분야가 생겼으니, 무역분야였다. 칼미크는 러시아에서 물자를 받아서 이웃 이슬람국가 또는 동족인 준가르와 거래를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칼미크의 대외교역을 차단하려 했다. 들판에서 야생하던 몽골족은 농경민족인 차르국과 협력과 충돌을 반복하게 되었다.

1660년 칼미크는 시베리아 도시 톰스크를 공격했으나, 1666년엔 러시아의 타타르 공격에 동참했다. 그러다가 1680년 러시아 펜자를 공격했고, 곧이어 러시아의 크림칸국 공격에 합류했다. 칼미크가 마냥 러시아에 복종하진 않은 것이다.

 

아유카 칸 /위키피디아
아유카 칸 /위키피디아

 

칼미크의 전성시대는 아유카 칸(Ayuka Khan, 재위 1672-1723)의 시절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요구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아유카 시절에 칼미크는 러시아와 함께 북코카서스, 크림반도 공격에 동참했다. 아유카는 카자흐, 투르크멘을 공격해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코카서스의 체첸을 공격하라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했다.

1690년 티벳의 달라이라마는 아유카에게 칸(Khan)의 지위를 하사했다. 몽골족에게서 칸이란 칭호는 칭기스칸 후손들에게만 내려지고, 오이라트 부족은 타이시(太師)란 칭호를 사용했는데, 라마교의 수장이 칸의 지휘를 부여한 것이다.

아유카 칸은 중국에 아워치(阿玉治)로 알려졌다. 아유카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아유카의 사신은 2년 남짓 시베리아를 돌아 1712년에 베이징에 도착해 강희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강희제는 볼가강의 사절단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강희제의 입장에서는 토르구트가 동족인 준가르와 합세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사신들은 강희제의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

강희제는 토르구트를 회유하기 위해 곧바로 만주 귀족 툴리센(鬪理珗)을 코카서스로 파견했다. 툴리센 일행도 시베리아로 에돌아 2년만인 1714년에 볼가강가에 있는 킬미크칸국에 도착했다. 툴리센은 이 여행을 기록해 이역록’(異域錄)을 남겼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투르후트 부족은 청나라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마다 명절 복장을 갈아입고 찾아와 인사를 올렸고, 툴리센이 강희제의 성지(聖旨)를 높이 들고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청나라 사신의 왕래를 불쾌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우바시 칸 /위키피디아
우바시 칸 /위키피디아

 

아유카가 죽은 후 칼미크에 내분이 일어나 여러 분파가 싸웠고, 러시아 차르는 칼미크 칸국의 자치권을 서서히 빼앗기 시작했다. 차르는 러시아인과 독일인을 볼가강 하류에 정착하도록 해 몽골족의 생활기반을 좁혀 들어갔고,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의 새로운 이민자들은 그들의 유목지에 이주시켰다. 게다가 차르는 칼미크 칸의 위에 위원회를 두어 내정에 간섭했다. 더욱이 칼미크족에게 불교를 버리고 러시아정교를 믿으라고 강요했다. 몽골족들은 더 이상 이곳이 희망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아유카의 증손자 우바시(Ubashi, 渥巴锡)가 새 칸이 되었는데, 러시아 조정이 그를 책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미크 귀족들에게 칸을 바꾸라고 지시하며, 우바시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가려고 했다.

우바시는 부족회의를 열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칼미크족은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에게서 길일을 받아두었다. 출발은 볼가강이 어는 17711월로 잡았다. 출발에 앞서 칼미크족은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 참여해 상당한 무기를 비축해 두었다.

그들은 볼가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해 겨울 볼가강은 얼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다는 소문이 차르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수도 없었다. 하는수 없이 볼가강 서안의 부족들은 달라이라마가 선택해준 날에 이동을 했고, 동안의 부족들은 남게 되었다.

러시아의 차르 예카테리나 2세는 칼미크족이 귀향했다는 보고를 듣고 노발대발했다. 그는 즉시 대군을 편성해 몽골족의 뒤를 쫓았다. 러시아와 이슬람 투르크인의 협공으로 수많은 킬미크족이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고, 부족 전원이 피해가 막심했다.

투르후트의 고난의 행군은 7개월이 걸렸다. 러시아군을 피해서 사막이나 늪지로 가야 했고, 험한 산을 넘어야 했다. 그들은 마침내 중국 영내인 발하시 호수(Balkhash Lake)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 20만명의 인원이 도착했을 때 7만명 정도로 줄었다. 3분의1 정도만 돌아온 것이다. 청나라는 돌아온 토르구트에게 목초지를 나누어 주고 분산시켰다.

 

토르구트족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토르구트족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모습 /위키피디아

 

볼가강 하류에 남아 있던 칼미크족은 칸국의 지위가 박탈되고 러시아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이 몽골의 후예들이 러시아의 칼미키야 공화국(Republic of Kalmykia)이다. 지리적으로는 유럽에 속한다. 따라서 칼미키야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 공화국이다. 인구 30만명의 칼미키야에는 몽골계 칼미크족이 전체의 57.4%를 차지하고, 47.6%가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다. 아직도 칼미키야 공화국의 수반은 러시아 대통령이 지명하고, 칼미키야 의회의 비준을 받는다.

이 칼미크족과 동족이 중국 서부 신장(新疆)에 살고 있다. 칼미크족 또는 토르구트족은 중국 신장지역에 15, 몽골 호브드(Khovd) 지역에 1, 러시아 칼미키야 공화국에 17만명이 살고 있다.

청나라 시절에 돌아온 토르구트족을 신토르구트,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 칼미크, 처음부터 러시아로 이주하지 않았던 종족은 구토르구트라고 했다.

 


<참고자료>

Wikipedia, Kalmyk Khanate

Wikipedia, Ayuka Khan

Wikipedia, Ubashi Khan

Wikipedia, Kalmy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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