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③…동해 군사령관, 실직군주
이사부③…동해 군사령관, 실직군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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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조카 이사부를 파견해 고구려에서 빼앗은 영동지역 공고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사부의 이름이 처음 등장할 때가 지증왕 6(505)이다.

지증왕 6(505) 2, 임금이 몸소 나라 안의 주()()()을 정했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군주(軍主)의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됐다.”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

 

지증왕은 강원도 영동지역에 실직주를 설치해 행정구역에 편입시켜고, 조카인 이사부를 파견했다. 그러면 실직이란 고을은 어떤 곳인가.

신라시대 실직(悉直)은 지금 강원도 삼척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실직을 사직(史直)’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삼척에 사직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실직사직삼척의 음운 변화를 통해 실직의 옛이름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사부 장군이 실직군주가 된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삼국사기>에 이사부의 활약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실직 군주에 부임한 505년에서 대가야를 함락한 562년까지 57년간이다. 지증왕이 최고 전략지로 선택한 실직의 군주로 이사부를 파견할 때 나이는 적어도 성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열전에 화랑 사다함이 15~16세에 종군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하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비춰보면 한 지역을 관장하는 군사책임자로서 20세를 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20대초는 한창 팔팔할 나이다. 그 나이에 지증 임금이 처음으로 설치한 속주(실직주)의 군주(軍主) 자리에 임명된다. 그것도 수도 서라벌에서 180km(450) 떨어진 실직이라는 변경의 야전 사령관 자리를 맡는다.

 

삼국시대 초기 강원도 영동지방에는 예(), 실직(悉直), 말갈(靺鞨) 등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했다. 2세기초 파사 임금 때 신라는 독립국이던 실직국(悉直國)을 정복했다. 그 이후 영동지방은 예와 말갈의 공격을 수차례 받았고, 4세기 이후 고구려가 영동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들 소부족을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부임했을 때 신라는 하슬라(강릉)에 대한 지배를 공고하게 다지지 못했다. 따라서 지증왕은 이사부를 실직에 보내 그곳을 북진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는 505년 실직군주에서 512년 하슬라군주로 부임지를 변경하는데, 7년 사이에 신라의 동해안 영역이 삼척에서 강릉으로 확대되고, 울릉도 정벌을 위한 준비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영동지역에 오랫동안 터를 닦아온 원주민인 예족과 말갈족이 고구려에 붙어 신라에 적대적이었다. 정복당한 실직국인들은 동족인 예족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고구려와 말갈이 단숨에 서라벌 인근인 미질부성(흥해)까지 밀고 내려올 때 그 중간에 있던 실직 원주민의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소지 임금때 전투에 승리해 간신히 영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지만, 언제 고구려에 동조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시기였다.

지증 임금이 국가체제를 정비해 주군현(州郡縣) 제도를 만들고 실직주에 처음으로 군주(君主)를 둔 것은 전략적으로 동해안에 대한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영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부여준 것이다. 그 곳에 첫 군주로 보낸 인물은 가장 믿을만한 조카 이사부였다.

 

그러먼 군주(軍主)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의미 그대로 하면 군대의 수장이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가 되고 19년후인 법흥왕 11(524) 세워진 울진 봉평신라비에는 실지군주(悉支軍主)와 실지도사(悉支道使)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실지는 실직을 의미한다.)

도사라는 표현은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파견되기 직전인 501(지증 2)503(지증 4)에 각각 세워진 포항 중성리비영일 냉수리비에도 나온다.

도사(道使)는 현지에서 세금을 걷고 백성의 관리하는 행정직이다. 이에 비해 군주(君主)는 외적의 침공을 막고 때론 공세적으로 주변을 공략하는 전투 조직의 수장을 의미한다. 신라는 외직을 임명할 때 군사직과 행정직을 나눠 운용했다. 신라가 삼척 일대 동해안을 영토화하면서 서라벌 출신(王京人)의 행정관을 보내 직할통치를 했음을 의미한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갈 때, 이사부와는 별도로 누군가를 실직 도사에 임명해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도사는 실직주의 행정을 관할하고, 이사부는 서라벌에서 파견한 군대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사부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군을 관할했다기보다, 중앙에서 파견한 군을 맡았고, 병졸 또는 하위직에 현지인을 썼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시설이 미비한 신라시대에 경주에서 삼척까지 사람을 보내 연통을 넣거나 물자를 실어올 때 적어도 몇주는 걸렸다. 또다른 왕경인이 실직 도사를 맡았더라도 왕족 가운데서 최고의 실력자가 국경에 부임했으므로, 왕국 수도의 지시, 보고 없이도 통치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이사부는 동해안 일대와 동해 바다를 관장하는 육군과 해군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식민지 총독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후세는 그를 동해왕이라고 부른다.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 해안의 이사부 우산국 정복 기념비 /김현민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 해안의 이사부 우산국 정복 기념비 /김현민

 

이사부는 실직군주로 부임하면서 어떤 길로 왔을까. <삼척군지>에는 이사부 장군이 제일 처음 실직에 올 때 수륙군(水陸軍)을 동원하여 오십천 하구로 상륙하였다로 기록돼 있다. 김태수 삼척문화예술센터 소장(국학박사)이사부가 실직군주로 부임해 올 때 해로로 왔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경주에서 삼척까지 육로는 험난하다. 동해안을 따라가면 곳곳에 해안절벽이 가로막고 있고, 경상도 내륙을 거쳐 태백산을 넘어가는 길은 그 당시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바닷길이다.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임명되던 해 겨울에 지증왕이 선박이용 제도를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가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동해안을 직할 통치하고, 나아가 울릉도를 복속시키고 왜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던 것 같다.

삼척은 동해안 교역로의 중심에 있었다. 신라에 의해 멸망한 실직국은 멀리 남해안의 금관가야에서 북으로는 옥저, 예국까지 철광석을 무역하는 해상왕국이었다. 실직인들은 선박 건조능력은 물론 항해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파악된다.

삼국시대 초기에 함경남도에서 강원도, 경상북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는 동이(東夷)족의 한 갈래인 예족(濊族)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이었다. 함경남도 안변에서 강원도 속초, 강릉, 삼척, 경상북도 울진, 영해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부임했을 때 신라와 예국의 경계선은 삼척과 강릉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가 실직에서 하슬라로 임지를 바꾼 505년에서 512년 사이 7년 동안에 그의 공적을 언급한 사료가 없다. 공백이다. 하지만 실직 군주 이사부는 우산국을 공략하기 앞서 삼척에서 강릉 이북까지 내지화(內地化)하고, 북쪽으로 양양,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을 넘어 평창으로 추정되는 니하(泥河)를 재탈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군을 강릉까지 밀어붙인후 이사부의 다음 목표는 왜()와 연합해 신라에 저항하는 우산국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동해를 내해화(內海化)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동해는 신라의 바다라고 할수 없었다. 지증마립간 이전인 소지마립간까지 왜는 수시로 안방처럼 신라를 공격했고, 왕성인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노략질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거나 끌고갔다.

지증왕의 뜻은 왜구 소탕에 있었다. 드디어 이사부는 임금의 뜻을 받잡아 동해로 눈을 돌렸다.

 

삼척항 부근도 /네이버 지도
삼척항 부근도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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