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정벌에 전사한 코사크 대장 스테파노프
나선정벌에 전사한 코사크 대장 스테파노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15 14: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청의 요청에 파병…전투에서 우수한 조총술 과시, 코사크 제압

 

러시아의 코사크 부대와 청나라 정규군과의 첫 전투는 1652324일 벌어졌다. 예르페이 하바로프의 코사크 부대는 200명에 불과했고, 청나라 장수 하이세(海色)2,00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코사크부대의 무기가 청군에 비해 우수했다. 하바로프의 원정대는 전원 총으로 무장한데 비해, 청군에겐 대포 6문과 장총 30정에 불과했다. 총과 칼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화력이 우수해도 병력수가 10배나 되었기 때문에 청군도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청군 장수 하이세의 무능이다. 코사크들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아찬스크 요새에 집결해 있었다. 청군은 목책을 부수고 요새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 순간 재빠르게 코사크들을 섬멸했어야 한다. 그런데 하이세는 코사크를 생포하라고 지시했다. 그 틈을 이용해 코사크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청나라 군대를 짓밟았다. 청군은 670명이 사망하고 830필의 말을 잃은데 비해 코사크의 손실은 10명 전사에 78명 부상자였다.

 

청 황제 순치제는 패장 하이세를 사형에 처하고 사르후다(沙尔虎达)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사르후다는 만주족 8기군 출신으로, 도르곤을 따라 만리장성을 넘고 베이징 공격에 가담한 정예장교 출신이었으며, 아무르강 지류인 쑹화강에서 태어나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사르후다는 유능했다. 그는 패배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대책을 수립했다. 첫째는 장기전으로 돌입하기 위해 코사크를 굶게 하는 것이다. 사르후다는 다우르족과 현지 부족에게 먹을 것을 싸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 둘째는 코사크가 배를 타고 아무르 본류와 지류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것을 저지해야 했다. 사르후다는 지린(吉林)에서 배 40척 이상을 건조했다. 셋째는 코사크에 비해 열등한 화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사르후다는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조총을 잘 다루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즉시 베이징 조정에 조선군의 조총부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 불똥이 튄 것이 두차례의 나선정벌이다.

 

17세기 중엽 아무르강 일대 청군과 코사크의 전투지역 /위키피디아
17세기 중엽 아무르강 일대 청군과 코사크의 전투지역 /위키피디아

 

16542월 베이징에 사신을 다녀온 한거원(韓巨源)이 효종에게 조총을 잘 쏘는 병사 100명을 선발해 파병해달라는 청의 요구를 보고했다. 당시 조선은 러시아를 모르고 있었다. 중국에서 들은 대로 러시아(Russian)를 나선(羅禪)이라고 했다. 효종실록에 임금이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하고 묻자, 한거원이 "영고탑(寧古塔)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고 아뢰었다. 영고탑은 지금의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이다. 효종은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수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주어 정벌군을 편성, 파견했다.

 

러시아에서도 아무르강 책임자가 바뀌었다. 하바로프는 원주민을 방화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차르의 명령을 어겼다는 혐의로 1653년 모스크바로 압송되었고, 그의 부관이었던 오누프리 스테파노프(Onufriy Stepanov)가 아무르 코사크 부대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스테파노프에게 남겨진 병력은 320명에 불과했다. 청 장군 사르후다의 전술에 의해 먹을 것이 부족했다. 요새를 짓거나 배를 건조할 나무도 모자랐다. 결국은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대는 배를 타고 쑹화강과 아무르 하류를 돌아다니며 원주민을 찾아 나섰다. 원주민들은 다우르족과 길랴크족 등 현지 부족들은 식량을 들고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스테파노프는 쑹화강 유역에 흩어져 개별활동을 하던 코사크 무리들을 흡수해 병력을 보충했다. 그의 부대는 그럭저럭 400~500명을 헤아렸다.

 

1654428일 스테파노프 부대는 아무르에서 쑹화강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조청연합군을 마주쳤다. 청나라 군대는 수전으로 코사크부대를 막아서고 조선군은 조총으로 적군을 사살했다. 청군의 배가 코사크의 배에 비해 작았기 때문에 수전에서 연합군은 밀렸지만, 조선군의 우수한 사격술로 코사크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코사크들은 수세로 몰려 도주했다. 청군의 함선은 나흘동안 코사크를 추격했다. 7일간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한명도 사상자를 내지 않았고 613일 영고탑으로 돌아와 귀국했다.

 

스테파노프의 코사크들은 헤이룽장성 후마현(呼瑪縣)에 있는 쿠마르스크(Kumarsk) 요새에서 집결했다. 16553월 청군은 1만명이 쿠마라스크를 에워싸고 한달 가까이 공격했으나 코사크의 포격을 이겨낼수 없어 항복을 받는데 실패했다. (이 요새는 중국쪽 강변에 있기 때문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중국에 귀속되었다.)

스테파노프의 부대는 모스크바로부터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군에 쫓겨 다녀녔다. 코사크는 아무르 하류에 요새를 짓고 길랴크 부족들에게서 담비와 붉은 여우, 은빛 여우의 모피를 야삭을 받았다. 피난을 가지 않은 주민들에게서 식량을 약탈했기 때문에 원주민의 궁핍도 가속화되었다. 코사크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일부 농사를 짓기도 했다.

스테파노프 일당의 토색질이 계속되자, 1658년 청 조정은 아무르 일대의 코사크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사르후다는 이번에도 조선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효종은 또 군대를 파견했으니, 2차 나선정벌이다.

조선은 혜산참사 신유(申瀏)를 파병대장으로 삼고, 조총수 200, 기고수와 초관 등 총 260여명을 파병했다. 조선군은 52일 두만강을 건너 610일 쑹화강과 아무르강 합류 지점에 도착했다.

630500명의 코사크는 11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이동하다가 사르후다가 이끄는 49~50여척의 함대와 1,400명의 조청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코사크는 절반이 넘는 270명이 전사했다. 또 코사크의 사령관 스테파노프도 전사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군의 뛰어난 조총술이 전세를 판가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스테파노프의 부하 페트릴로프스키는 이 전투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와 코사크 병사 270명이 전사했다.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가죽 3,080, 대포 6, 화약, , 군기, 식량 등을 실은 배가 모두 침몰했다. 성상(聖像)을 실은 배 1척에 95명이 올라타 간신히 탈출했다.”

스테파노프가 사망한 후 아무르강의 코사크 부대는 해체되었다. 잔당 222명은 도주했으며, 그중 180명은 불법적으로 무리를 이루어 아무르 일대를 어슬렁거리다가 1660년대에 청군에 소탕되었다. 러시아의 코사크가 조선의 2차 나선정벌군이 참여한 연합군에 대패한 이후 15년간 아무르 일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Onufriy Stepanov

Wikipedia, Sino-Russian border conflicts

Wikipedia, Battle of Hutong (1658)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