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진①…아무르 강변의 독립왕국 작사국
알바진①…아무르 강변의 독립왕국 작사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1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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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귀족 체르니고프스키가 설립…그의 죽음올 10년만에 러시아로 귀속

 

아무르강(흑룡강)의 지류인 실카강과 아르군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200km쯤 하류로 내려가면 알바지노(Albazino)란 곳이 있다. 러시아 아무르주에 속한다.

이곳은 아무르강을 탐사한 코사크 예로페이 하바로프가 1650년 겨울을 보내기 위해 만든 동계숙영지로 시작되었다. 하바로프가 이곳에 오기 전에 몽골족 일파인 다우르족이 세운 솔론칸국(索倫汗國)이 있었고, 그 부족장()의 이름이 알바자(Albaza, 阿爾巴西)였다. 하바로프는 다우르 부족장의 이름을 따 알바진(Albazin)이라 했고, 한자로는 阿勒巴沁으로 표기된다. 1651년 봄이 오자, 하바로프와 대원들이 이곳을 떠났고, 숙영지는 방치되었다.

 

알바진의 위치 /위키피디아
알바진의 위치 /위키피디아

 

알바진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폴란드 귀족으로 예니세이강 상류 일림스크에 유배와 있던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Nikifor Chernigovsky)1665년 보예보다(지방관)를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쳐 독립국을 세우면서다.

체르니고프스키는 1633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차르에 충성하고 그리스정교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얼마후 그는 변심해 동료들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러시아에 저항했다. 하지만 또다시 잡혀 시베리아 예니세이스크로 유배왔다. 그는 유배지에 부인을 데려갔고, 아들 셋, 딸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1664년 일림스크의 보예보다가 시집간 딸을 겁탈했다. 그는 두 번째 반란을 시도했다. 체르니고프스키는 보예보다를 죽이고 84명의 코사크 무리를 이끌고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에 있는 알바진으로 도망쳤다.

1665년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알바진은 폐허였다. 하바로프가 지나간 이후 탈영자와 무법자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목책을 다시 세우고 진지를 구축했다.

체르니고프스키는 알바진에서 무리를 모았다. 이탈한 코사크, 불법체류자들을 한데 모았다. 그는 앞서 하바로프의 잘못을 시정했다. 하바로프는 현지에서 약탈과 방화, 강간의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원주민 다우르족에게서 깊은 반감을 사고 있었다. 새로 온 유럽인들은 알서 온 원정대와 달리 원주민들에게 우호적으로 대우했다. 체르니고프스키는 자발적은 충성을 유도해 다우르족에게서 야삭을 받았다.

그는 나라 이름을 작사(Jaxa)라고 짓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곳은 체르니고프스키 일행이 오기 전에 다우르족이 雅克薩(yakesa)라고 했는데, 국명은 원지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초기에 코사크에 당했던 다우르족은 체르니코프의 작사국에 협조했다. 이 작은 왕국은 알바진에서 500km 떨어진 제야강 일대에도 지배권을 뻗쳤다.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던 보예보다들은 원정대를 보내 작사국을 여러차례 공격했지만 알바진의 코사크들은 러시아에 붙은 코사크들을 물리쳤다. 체르니고스프키를 따르는 코사크는 500명에 이르렀다.

 

​작사국의 문장 /위키피디아​
​작사국의 문장 /위키피디아​

 

체르니고스프키는 보예보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모스크바의 차르에 대해선 충성을 표시하며 신속(臣屬)을 맹세했다. 그는 현지 주민에게서 야삭으로 받은 모피를 차르에게 상납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 대해 차르가 조공국 또는 번국(蕃國)으로 인정해 주길 원했다.

차르의 입장에선 작사국을 멀리할 필요가 없었다. 모스크바 조정은 작사국을 적대국으로 만들면 중국의 편에 설 것이고, 차라리 중국 국경에 완충지대로 남겨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670년 알바진의 작사국은 중국군의 공격도 방어해 냈다. 차르는 작사국을 용인하는 해법을 찾았다. 일단 법원이 체르니고프스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차르가 사면해 주는 방식을 취했다. 1674년 차르는 마침내 체르니고프스키를 알바진의 보예보다로 임명함으로써, 작사국을 승인했다.

 

다우르족은 작사국에 조공을 바치며 중국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다우르의 부족장 가운데 간티무르(Ghantimur)란 족장이 있었다. 그는 1655년 러시아 코사크와 싸울 때엔 청군의 편에 섰고, 쿠마르스크 요새 공격에도 앞장섰다. 그러던 그가 작사왕국이 들어서자 러시아 쪽으로 돌아섰다. 청 장수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타우르족을 앞세우고 이리저리 전쟁 비용을 뜯는데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다. 1667년 간티무르는 300명의 부락민을 데리고 러시아 요새 네르친스크로 넘어갔다.

 

1670년 네르친스크 보예보다인 이그나티 밀로바노프(Ignatiy Milovanov)가 차르의 특사로 베이징에 도착해 16새가 된 강희제를 알현했다. 그는 만주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 러시아의 첫 외교사절이었다.

밀로바토프는 차르의 칙서를 강희제에 전달했는데, 차르이ㅡ 편지에는 중국 칸(황제)이 러시아 차르에게 귀의하여 공납을 바치라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는 러시아어를 번역할 통역관이 없어 차르의 칙서를 읽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밀로바노프가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고 공물을 바치자 강희제가 흡족해 하면서 하사품을 내리고 연회도 베풀었다.

강희제는 차르에 보내는 친서를 밀로바노프에게 주었는데, 친서에는 알바진의 불법점거를 중지하고 간티무르의 무리를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강희제의 친서도 러시아측에서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해독불가였다고 한다.

양국의 첫 외교접촉은 상대방 언어를 해독하지 못한 상태에서 끝났다. 청국도 곧바로 삼번의 난을 진압하느라 북방 오랑캐의 준동을 제압할 여력이 없었다.

 

작사왕국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도 알려져 유럽의 사절단이 방문해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르강의 작은 왕국은 건국자 체르니고프스키가 1675년에 사망하면서 소멸되었다. 러시아는 작사국을 계승해 보예보다를 직접 파견했다. 이로써 작사국의 수도이자 전부인 알바진은 10년간 독립을 유지하다 러시아의 직할령이 되었다.

 

1681년 삼번의 난을 진압한 후 강희제는 북방에 신경을 쓸 여유가 생겼다. 황제는 러시아에 알바진에서의 철수와 간티무르의 송환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거부했다. 러시아는 알바진에 주둔군을 강화했고, 간티무르는 그리스정교로 전환하고 네르친스크에 눌러 앉아버렸다.

강희제는 총명했다. 말로 안되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황제는 관리를 알바진으로 보내 그곳 무력을 정탐하게 했다. 강희제는 1682년에 만주 선양(瀋陽)까지 직접 행차해 상황을 확인했다.

그는 그동안의 보급기지인 영고탑에서 알바진까지 너무 멀기 때문에 흑룡강(아무르) 일대에 병력을 주둔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희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창설하고 현지에 밭(둔전)을 일궈 다우르족 병사 3,000명을 주둔시켰다. 이제 알바진을 탈환하는 일만 남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Nikifor Chernigovsky

Wikipedia, Sino-Russian border conflicts

Wikipedia, Albazino

Wikipedia, Gantimur

Wikipedia, Jaxa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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