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진②…청나라의 완벽한 승리
알바진②…청나라의 완벽한 승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18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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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 1685·1686년 두차례 걸쳐 제압…차르의 요청으로 포위 풀어

 

중국 청조에 삼번의 난(1673~1681)이 일어나자 몽골족이 동요했다. 강희제는 내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했고, 그 틈에 중국 서부 신쟝 일대에 오이라트족이 세력을 결집했다. 오이라트 가운데 우세한 준가르의 갈단은 1677년 서몽골을 대표하는 칸()을 자처했으며, 티베트 불교의 수장 달라이라마는 그에게 보슉투칸이란 칭호를 하사했다.

몽골족의 동요는 이탈자가 생겨났다. 아무르강 유역의 다우르족은 대체로 청에 복종는데 부족장의 하나인 간티무르는 청의 병력동원에 불만을 품고 러시아로 귀순했다. 강희제는 간티무르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청 조정은 러시아에 간티무르의 송환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청의 요구를 잘라 거절했다.

삼번의 난이 진압된 후 상황은 달라졌다. 강희제는 오이라트가 세력을 결집하기 전에 국경을 교란하는 러시아를 무력을 응징할 것을 다짐했다. 중국은 헤이룽장성 아이훈(璦琿)과 넌장(嫩江)에 성을 쌓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북쪽 국경에 홍이포(紅夷砲)를 배치했다. 홍이포는 붉은 머리의 오랑캐’(紅夷)라 부르던 네덜란드인들에게서 전수받은 대포를 개조한 것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삼번의 난이 끝나자 청군은 이 대포를 코사크와 대치하고 있는 아무르강으로 이동시켰다.

 

홍이포 /위키피디아
홍이포 /위키피디아

 

준비를 마친 청군은 1685623일 러시아의 아무르 요새 알바진을 선제적으로 공격했다. 청의 장수는 만주족 출신 펑춘(彭春), 러시아의 알바진 보예보다는 알렉세이 톨부진(Akeksey Tolbuzin)이었다. 청군은 병력 3,000명에 포 100~150, 장총 40~50, 머스켓 총 100정으로 무장했다. 당시 알바진 요새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코사크 부대는 450~500명 정도였고, 머스켓 총 300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알바진을 공격했다. 공격 첫날에 목책은 부서지고 코사크 100여명이 죽었다. 톨부진은 더 이상 싸울수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강희제는 러시아에 아량을 베풀었다. 펑춘은 황제의 지시로 톨루진는 물론 가족, 부하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청나라로 잔류하겠다는 코사크 50여명을 받아들였다. 톨루진은 부하들을 이끌고 네르친스크로 갔다.

펑춘은 알바진 요새와 그 주변의 러시아 시설들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피난 갔던 다우르족을 다시 불러 농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병력을 철수해 아이훈성으로 돌아갔다. 청군의 1차 공격은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얼마후 네르친스크의 보예보다 블라소프가 청군이 알바진에서 완전 철수하고 원주민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툴부진에게 병력 500명을 주어 알바진을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톨부진은 요새를 강화했다. 그는 독일(프로이센) 포로로 시베리아에 유배와 있던 바이톤(Afanasii Ivanovich Beiton)을 부관으로 삼아 유럽식 진지로 신축했다. 성벽을 새로 쌓고 동측 벽은 진흙과 나무뿌리를 뒤섞어 중국의 화포 공격을 방어할수 있도록 강화했다.

강희제는 알바진에 러시아인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화가 치밀었다. 한번 놓아주었던 적들이 다시 기어들어온 것은 용서할수 없는 일이었다. 강희제는 펑춘에게 러시아 침략군을 완전히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알바진 요새를 포위한 청군(1686) /위키피디아
알바진 요새를 포위한 청군(1686) /위키피디아

 

펑춘은 랑탄(郞淡)에게 병력 3,000명을 주어 알바진을 공격하게 했다. 16867월 청군의 2차 공격이 시작되었다. 알바진은 한해전과 달랐다. 청군은 남축 벽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지만 성채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청군이 큰 손실을 입었다. 코사크들은 성채에서 농성하면서 유격전술로 청군을 공격해 포로를 잡아가기도 했다.

랑탄은 초동공격이 실패하자 장기전을 구사했다. 8월 청군은 알바진을 포위하는 목책을 치고 병력을 배치, 포위에 들어갔다. 코사크들이 강가로 가서 물을 구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요새 내에는 코사크와 그 가족 등 모두 800명이 있었다. 그들은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렸다. 포위초기 4일 연속으로 물을 구하러 유격대를 보냈지만 청군의 매복에 번번히 실패했다. 알바진의 방어병들은 굶주림과 갈증에 서서히 죽어갔다. 괴혈병, 티푸스, 콜레라 등 각종 질병도 만연했다. 800명이던 러시아인들은 11월초에 150명으로 줄었다. 보예보다 톨부진도 살아 남지 못했다.

모스크바에서 먼저 협상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베이징에 사절단을 보내 알바진의 포위를 풀어달라는 차르의 친서를 전달했다. 일종의 항복문서였다. 청나라 병사들도 지쳐갔다. 강희제는 12월 알바진에 칙사를 보내 포위를 풀라고 지시했다. 800명의 병사 가운데 24명만 살아 돌아갔다. 청군은 돌아가는 러시아병사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아량도 베풀었다.

러시아군이 떠난 이듬해 청군은 알바진이 자국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그곳에서 철수했다. 곧이어 두 나라 사이에 협상이 벌어져 국경조약이 체결되었으니,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Sino-Russian border conflicts

Wikipedia, Albazino

Wikipedia, Siege of Albaz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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