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된 10만 양병론, 잊혀진 징비록
무시된 10만 양병론, 잊혀진 징비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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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왜란에 대비 못했나…사대부들은 성리학 논쟁과 당파싸움에 매몰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기 9년전인 1583년 율곡 이이(李珥)는 병조판서를 맡고 있었다. 그는 선조 임금과의 경연에서 10만 양병론을 건의했다. 1)

이이가 말씀을 올렸다.

나라의 위세가 떨치지 못함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실로 흙이 무너지는 듯한 화가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미리 10만명의 군사를 양성해 도성에 2만명, 각도에 1만명씩 배치하되 호세(戶稅)를 면제하고 무예를 단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6개월로 나누어 교체하도록 하면서 도성을 수비하도록 하고, 변란 소식을 들으면 모두 10만명이 지키도록 완급에 따라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시정의 백성을 급히 모집해 싸워야 하니, 큰일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에 유성룡(柳成龍)이 말했다.

불가합니다. 사변이 없는데,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기르는 것입니다.”

경연에 참가한 신하들은 모두 이이의 말이 지나친 우려라고 말했다. 결국 이이의 10만 양병론은 시행되지 못했다.

이이는 경연에서 물러나 유성룡에게 속된 유자(儒者)는 시의(時宜)에 통달하지 못한 법인데, 귀공도 그런 말을 하는가라고 물었다.

9년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은 이이가 참된 성인이었다. 만일 그 말을 받아들였다면 어찌 나리 일이 이렇게 되었겠는가라고 개탄했다.

 

선조는 임금이 되면서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사화를 거치면서 재야에 묻혔던 사림파가 드디어 정권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이이는 기호학파의 중심인물로 동인으로 분류되었고, 유성룡은 이황의 영남학파를 이은 서인이었다. 유성룡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했고, 다른 당파 영수의 올바른 견해에 무조건 반대하는 우를 범했다.

 

그러던 유성룡은 7년 전쟁을 체험한후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왜란을 치르면서 겪은 경험을 반성하고, 후세에 후환을 경계하도록 일깨우기 위해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 유성룡은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만나고 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국보 132호 징비록 /문화재청
국보 132호 징비록 /문화재청

 

부산에 도착한 황윤길은 먼저 일행이 겪은 내용을 기록한 글을 올리면서 머지 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을 보고했다. 이후 임금께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똑같은 보고를 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전혀 다른 보고를 을렸다. “신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나이다.” 계속해서 김성일은 말했다. “윤길은 공연히 인심을 현혹시키고 있사옵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의 의견도 뚤로 나뉘게 되었다.

나중에 김성일을 만나 나는 물었다. “그대 의견이 상사와 전혀 다르니,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그러자 김성일은 대답했다.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길의 말이 너무 강경해 잘못하면 나라 안 인심이 동요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황윤길은 서인이고,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일본에 가서 똑같은 것을 보고 와서도 정사와 부사는 당파적 견해에 매몰되었던 것이다.

 

왜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당파가 갈려 논란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조정은 나름 전쟁에 대한 준비는 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전쟁 대비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2)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부 지방에 방어를 밑도록 하고,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평안했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나의 동년배인 이로(李魯)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그러고는 조정의 일에 불만을 늘어 놓았다.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있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 넘는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아니 넓디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막지 못할 왜적을 아까짓 한줄기 냇물로 막을수 있다니, 내가 답답했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한 그 시기, 조선에서는 집권 사림파가 동서 양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벌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빠져 처음엔 철학적 논쟁을 벌이다가 철학적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파당적 싸움으로 확대했다. 스승의 학설을 고수하면서 학연과 지연이 섞여 학파가 생기고 당파가 결합되었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다가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졌다. 그 복잡한 파당과 주의·주장을 상세하게 연구한 사학자들이 많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후대에서 묵과할수 없는 것은 나라의 지도자급인 사대부가 전란이 임박했음에도 그 가능성과 임박성에 대해서마저 파당적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전란 바로 직전에 쓰여졌다. 정쟁에서 밀려난 당파 지도자가 나라의 위기를 인지하지 못한채 임금이 다시 불러주길 기다리는 마음을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정여립 역모사건(1589), 광해군 세자 옹립 사건(1591) 등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적 제거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걸었다.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위키피디아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위키피디아

 

1592412일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이끄는 제118,000명이 부산에 기습 상륙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을 다녀와 왜의 침략 가능성을 부정했던 김성일은 자신의 주장과 달리 적이 처들어오니, 당황했지만 경상도 상주로 달려가 적과 맞섰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라도 하는 듯 고을마다 격문을 띄워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김성일이 전투 채비를 하는데,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 임금에게 잘못된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의금부 도사로부터 체포명령을 받았다. 김성일은 체포되어 가면서 경상감사 김수에게 반드시 힘을 다해 적을 물리쳐 주오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고 <징비록>은 전한다. 3)

김성일이 충남 직산에 당도할 무렵, 임금의 노여움이 풀어져 그 죄가 용서되었다. 이 과정에서 같은 당파인 유성룡이 김성일을 적극 변호한 게 주효했다고 한다.

김성일은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전투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허물을 씻기 위해 공을 세우려고 무척 노력했다. 경상도로 내려가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과 군량미를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에도 크게 기여했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에게 의병장들과 협력해 진주성을 지키게 했다. 1593년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왜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쟁의 기미를 미리 알아채고 준비를 하지 못했을까. 율곡 이이처럼 미리 왜란의 가능성을 예측한 선각자도 있었는데, 왜 대다수 신하들이 그의 말을 지나친 우려라고 깎아 내렸을까. 이이의 말에 태클을 선 사람중 한 사람이 유성룡이다. 그는 후대를 위해 징비록을 남겼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지 30년후에 정묘호란이, 그후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하도록 조선의 사대부들은 징비록의 교훈을 새기지 못했다. 그때만이 아니다. 400년후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반도를 도모하려 했을 때 사대부들은 그들의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후 또다시 1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다를 게 없어 보인다.

 


1)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강재언, 한길사

2)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징비록(懲毖錄), 류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서해문집

3)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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