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친스크 조약…러시아, 아무르강 포기하다
네르친스크 조약…러시아, 아무르강 포기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19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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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동부 확보, 중국과 교역 활성화…청나라, 오이라트 정벌에 주력

 

1685, 1686년 두차례에 걸친 알바진 전투에서 러시아는 청나라에 참담하게 패배했다. 러시아는 아무르강 유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접었다. 두 나라는 평화를 원했다. 중국의 입장에선 서부 몽골족인 오이라트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고 삼번의 난이후 원기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에선 발트해 전쟁으로 국고가 고갈되고 공동황제로 표트르 대제의 형인 이반 5세가 오랜 병을 앓고 있어 동방의 분쟁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양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국경협상이 시작되었다.

 

두 나라는 협상을 시작하기 전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중국측은 오랑캐와의 협상이므로 베이징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러시아는 국경 근처에서 협상을 하자고 했다. 여기서 청나라는 중화주의를 포기했다. 러시아를 더 이상 북방오랑캐(北狄)으로 보지 않고 황제국으로 대우한 것이다. 만주족도 한족에겐 동쪽 오랑캐(東夷)에 불과했다. 세력이 커지면 얕잡아 볼수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도 다급했다. 오이라트가 청에 복속한 할하족을 공격하는 바람에 강희제는 러시아와의 협상을 재촉했다. 협상장소는 외몽골과 시베리아의 중간지점인 바이칼호 근처 셀렌기스크(Selenginsk)로 정해졌다. 모스크바 조정은 토볼스크 보예보다의 아들인 표도르 골로빈에게 협상의 전권을 위임하고 500명의 무장병력을 붙여 주었다. 골로빈은 16871022일 셀린기스크에 도착했다. 청측에선 만주족 출신인 송고투(索額圖)가 대표단을 맡아 1688년 베이징을 떠났다.

송고투 일행이 셀렌기스크로 가는 도중에 오이라트가 할하족을 공격하면서 중도에 길이 차단되었다. 양국은 협상장소를 네르친스크로 변경하고 협상일자도 연기했다. 네르친스크는 코사크 탐험대가 1654년 바이칼 동부에 세운 요새로, 아무르강 진출의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16898월 양측 대표단은 무장병력을 호송한채 네르친스크에 도착했다. 골로빈은 1,000여명, 송고투는 1만여명을 대동했다. 숫적으론 청측이 압도적이었다. 협상이 깨지면 한판 붙자는 심사였다.

두 나라는 일단 회담장의 분위기를 정리했다. 회담장엔 각자 도끼와 칼을 든 300명의 병력만 들어가고 회담장 밖에는 500명의 무장병력을 두는 것으로 합의했다. 언어는 양측이 잘 아는 몽골어로 하자고 했지만 러시아측의 몽골어 통역이 의심스럽다는 청측의 이의 제기로 라틴어를 쓰기로 합의했다. 당시 베이징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제주이트 교단의 수사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cois Gerbillon)과 토마스 페리이라(Thomas Pereira.)였다. 두 수사는 네르친스크까지 동행해 양측의 통역을 맡았다.

 

1710년의 네르친스크(그림) /위키피디아
1710년의 네르친스크(그림) /위키피디아

 

협상에서 아무르강 유역이 청국 영토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었다. 청측은 알바진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데다 만주황실 아이신지로(愛新覺羅) 씨족의 발원지였기 때문에 내줄 용의가 없었다. 러시아측에서도 아무르 일대의 농업생산력이 기대 이하로 낮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영토확보보다는 중국과의 교역을 원했다.

골로빈은 아무르강(흑룡강)을 내주면서 네르친스크를 달라고 했다. 송고투는 바이칼호 동쪽 부랴트족 거주지는 외몽골의 영토이며, 이는 몽골의 칸을 겸하는 청 황제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골로빈은 네르친스크는 줄수 없다고 버텼다. 송고투는 무장병력을 동원해 네르친스크를 포위했다. 외교협상이 깨지고 전쟁으로 확대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는 송고투의 작전이었다. 송고투는 네르친스크를 내주라는 강희제의 밀지를 받아두고 있었다. 큰 판을 읽는 강희제의 입장에선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립화시키고 서역의 오이라트를 정벌하는 게 중요했다. 러시아와 오이라트가 동맹을 맺을 경우 네르친스크보다 더 큰 영토를 잃을수 있다는 게 강희제의 판단이었다. 두 명의 제주이트 수사가 양측을 오가며 협상을 중재했고, 송고투도 마지못해 협상에 응하는양, 상대방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네르친스크조약(1689), 아이훈조약(1858), 베이징조약(1860)에 의한 국경변동 /위키피디아
네르친스크조약(1689), 아이훈조약(1858), 베이징조약(1860)에 의한 국경변동 /위키피디아

 

양측은 827일 네르친스크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문은 라틴어를 정본으로 하고, 중국어, 러시아어, 만주어, 몽골어 등 5종으로 작성되었다. 라틴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많았는데, 이 오류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약의 6개조로 되어 있다. 대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이 바다에 이르는 선을 국경선으로 한다. 알바진 요새는 파괴한다. 양국의 백성은 여권(통행허가증)을 갖고 사사로이 무역을 할수 있다. 도망자는 추방한다. 양국 국민은 상대방 국가에 거주할수 있다. 과거의 갈등을 모두 잊고, 영구히 화평하도록 한다.

네르친스크 조약(尼布楚條約)은 중국으로선 서양 국가와의 첫 번째 협정이고, 양국의 평등한 기초 위에 채결한 협정이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변방국은 오랑캐라는 중화주의가 포기된 국제협정이기도 하다.

 

네르친스크 조약문 /위키피디아
네르친스크 조약문 /위키피디아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아무르강과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에 대한 욕심을 포기했다. 대신에 바이칼호 동쪽의 외몽골 북부지역을 얻었는데, 그 면적이 한반도 면적에 준하는 25에 달한다.

이 협상을 계기로 러시아는 중국과의 무역을 텄다. 1693년 이후 러시아 외교사절단은 3년마다 베이징을 방문했고, 대규모 대상(隊商)이 그들을 따라갔다. 대상 규모는 200명 이내로 베이징에 80일간 체류할수 있었다. 그들의 교역물품은 수입이건 수출이건 관세를 물지 않았다. 1718년까지 모두 10번의 러시아 대상이 베이징을 다녀갔다. 청나라는 이를 조공국 사신으로 대우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양국이 싸웠던 알바진 요새를 폭파하기로 한 것이다. 알바진은 조약에 따라 중국 영토로 되었다.

청은 협상에서 서몽골(오이라트)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러시아가 중립을 지킨다는 확약을 얻었다. 청이 네르친스크 일대를 떼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 강희제는 오이라트 정벌에 나섰고, 신쟝지역을 영토로 만들어 몽골() 지배이후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네르친스크 협상 때 중국측은 외몽골에 대한 국경도 확정하자고 했지만, 골로빈은 자신의 위임받지 못한 부분이라며 논의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지역에 대한 국경선은 또다른 협상에서 확정되었는데, 1727년 카흐타 조약이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청나라의 기력이 쇠하면서 170년 후인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을 빼앗기고, 2년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마저 빼앗겨 버렸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 국경선은 이때 그어진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Treaty of Nerchinsk

이매뉴얼 C.Y. 근현대 중국사(상권), 까치

임계순, 청사-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윤성학, 모피로드, 케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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