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로 외몽골 국경 정한 캬흐타 조약
외교로 외몽골 국경 정한 캬흐타 조약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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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청 쌍방의 이해관계 절충해 타협…양국간 무역 활성화 계기

 

1689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은 허점이 있었다. 외몽골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선을 획정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서몽골의 오이라트가 청조에 반기를 들고 외몽골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측 협상대표 표도르 골로빈은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며 몽골지역 국경 조율을 회피했고, 중국측도 오이라트를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는 청-오이라트 전쟁에 중립을 취하기로 한 약속을 이행했고, 그에 힘입어 청의 강희제는 오이라트 공격에 집중했다. 준가르에 내분이 일어났다. 갈단이 동몽골 원정에 떠난 사이에 그의 조카 체왕랍탄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 틈에 강희제는 외몽골 울란바타르 일대에서 갈단의 군대를 격파했고, 갈단이 서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갈단은 알타이산으로 도망갔다가 16974월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음독 자살했다.

갈단의 무리가 소멸되면서 청은 외몽골을 지배권에 넣고, 체왕랍탄을 신쟝-위구르 서부와 카자흐스탄 쪽으로 밀어냈다.

 

1688년 동아시아 정세도
1688년 동아시아 정세도

 

오이라트를 쫓아낸 후 외몽골 지역을 통한 러시아-중국 사이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시베리아는 농사를 지을수 없어 러시아인들은 유럽 러시아에서 곡물을 가져가는 것보다 중국에서 사오는 것이 수월했다. 시베리아와 중국, 유럽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육상무역로가 열렸다. 그들은 기존의 비단길(Silk Road)가 아닌 초원의 길’(Steppe Route)을 이용했다.

1693E. 이스브란트 이데스(Eberhard Isbrand Ides)를 단장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이 베이징에 파견되었다. 이데스는 청조에 3년마다 캐러반(隊商)을 파견하고 한번에 200명 이내의 인원이 베이징에 체류한다는 조건을 허락받았다. 이후 1718년까지 10번의 러시아 사절단과 대상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표트르 대제는 대상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국가 주도로 캐러반 사업을 벌여 중국과의 거래에서 얻는 이익을 국가수입으로 잡을 것을 추진하게 되었다. 1689~1722년 사이에 베이징으로 가는 캐러반 가운데 14개가 국가에 의해 운영되었고, 민간이 주도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러시아 캐러반은 네르친스크를 거쳐 갔는데, 이데스의 경우 모스크바에서 베이징까지 11개월이 걸렸다. 오고가는데만 2년이나 긴 시간을 허비했다.

민간 캐러반은 우르가(지금의 몽골 울란바타르)로 질러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민간인 상인들은 빠른 길로 다녔다. 1721년에 우르가를 거치는 민간 캐러반이 네르친스크를 거치는 국영 캐러반보다 4배나 많았다고 한다.

문제는 외몽골의 국경이 획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조직에서 이탈한 코사크들이 외몽골 국경에 어슬렁거렸다. 국경이 모호하기 때문에 러시아가 이를 추격하기도 껄끄러웠다. 또 몽골족들이 러시아 역내로 들어와 가축을 약탈하고 도주해 버렸다.

 

강희제는 오이라트 잔당들을 척결하는 게 우선 과제였다. 오이라트 부족 가운데 토르구트족은 러시아의 세력권인 볼가강 하류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강희제 말년에 토르구트족의 족장은 아워치(阿玉治)였다. 러시아와 오이라트, 중국 사이를 오가며 균형 외교를 취하며 입지를 강화했다. 그는 동족인 오이라트의 수장 체왕랍탄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유목민족에게 결혼은 동맹을 의미했다. 아워치는 러시아 차르정권에도 신속(臣屬)하면서 독자적인 행동을 했다. (아워치는 러시아에 아유카(Ayuka)로 알려져 있다.)

아워치는 중국에게도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오이라트에 들키지 않으려고 시베리아를 돌아 1712년 베이징에 도착했다. 강희제는 아워치의 사절단을 극진히 대접했는데, 아워치를 보듬어 체왕랍탄과 합세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계산이었다.

청은 1712년 곧바로 만주 귀족 툴리센(鬪理珗)을 대표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토르구트에 보냈다. 툴리센 일행은 베이징을 출발해 시베리아로 에돌아 2년만인 1714년에 볼가강에 도착했다. 툴리센 일행이 시베리아를 통과할 때 각지역의 보예보다들의 환대를 받았다고 그는 기행기 이역록(異域錄)에 기록했다.

 

1851년 북부 중국 지도 /위키피디아
1851년 북부 중국 지도 /위키피디아

 

1722년 강희제가 죽고 그의 아들 옹정제가 청 황제로 등극했다. 옹정제의 걱정은 러시아였다. 러시아와 체왕랍탄과 동맹을 맺을 것이 우려되었고, 그동안 러시아가 지켜온 중립화를 유지하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몽골 부족의 이탈도 걱정거리였다. 옹정제는 외몽골의 국경을 획정해 러시아에 단거리 교역로를 열어주고, 몽골족을 진무할 필요를 느꼈다.

러시아도 중국과의 육로무역을 확대하려 했다. 1725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1세는 옹정제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베이징에 파견했다. 블리디슬라비치 루구진스키(Sava Lukich Vladislavich-Raguzinsky)를 특명전권대사로 하는 사절단은 12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무장병력 1,500명을 대동했다. 이들은 17261021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러시아 사절단은 베이징에 6개월간 머물면서 외몽골 국경협상을 벌였다. 루구진스키는 지리전문가를 외몽골 국경에 파견해 지형을 측정하도록 했다.

중국측에선 툴리센이 협상을 맡았다. 중국도 외몽골지역에 대한 지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 지도측량자들이 그린 지도를 놓고 국경을 논했다. 루구진스키와 툴리센은 30차례나 회동했고, 프랑스 국적 제주이트 수사 도미니크 파레닌(Dominique Parrenin)이 양측을 오가며 협상을 중재했다.

청은 베이징에서 협상 서명을 하자고 했으나 러시아측은 상대국 수도에서 서명식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대등한 조건의 쌍무조약을 체결해본 적이 없는 청국은 서양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루구진스키와 툴리센은 30년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협상장소로 선정되었던 셀렌기스크 근처 부라(Bura)라는 곳에 가서 협정초안에 가서명했다. ‘부라 조약’(Treaty of Bura)은 베이징에 보내져 비준과정을 거쳐 1727628일 정식 서명절차를 밟았다. 그후 러시아는 셀렌기스크 북쪽 카흐타(Kyakhta)에 국경무역을 하는 도시를 세웠고, 조약 명칭도 캬흐타 조약(Treaty of Kyakhta)이라고 명명했다.

조약은 라틴어를 원본으로 하고,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중국어 번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주족 황실이 한족이 중화주의를 포기하고 러시아와 대등한 조약을 체결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청조는 캬흐타 조약에서 한반도 넓이에 해당하는 103,600의 외몽골 영토를 뚝 잘라 러시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곤 러시아에게 더 넘어오지 말라고 했다.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 1727년 캬흐타 조약을 통해 더 이상 중국으로 남진할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서쪽에선 카자흐스탄, 동쪽 시베리아에선 북쪽으로 진출한다. 1741년 베링이 알래스카를 발견하고, 캄차카를 근거지로 일본과 대치하는 것도 이 때부터다.

 


<참고자료>

Wikipeida, Kyakhta

Wikipeida, Treaty of Kyakhta (1727)

Wikipeida, Kyakhta trade

이매뉴얼 C.Y. , -현대 중국사(),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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