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④…우산국 정벌, 신라의 첫 해전승리
이사부④…우산국 정벌, 신라의 첫 해전승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0 1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우사자 위협에 우산국 주민들, 항복…신라의 동해 해상주도권 확보

 

이사부가 활동하는 6세기 이전에 신라를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가 섬나라 왜였다. <삼국사기>에는 시조인 혁거세 때년부터 왜의 침입 기사가 수십차례 나온다. 신라에게 왜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네차례나 수도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백성 1천명을 끌고 가는 침략 세력이었다. 임금의 동생을 볼모로 잡았고, 툭하면 대신의 딸을 왜왕에게 시집오라고 했다. 신라는 그만큼 해상 전투에 무력했다. 경주분지에 웅거하고 있는 부족연맹체에 지나지 않았다.

왜의 공격에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인 금성을 지켜 농성하고, 왜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수세적인 방법을 취했다. 신라는 물의 싸움(水戰)에 약했다. 임금도 이를 인정했다. 바다를 건너가 선제 공격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관문을 지켜 왜병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침내 신라는 내륙이 아니라, 해안에서 왜의 침공을 저지했다. 실성 14(415), 신라 수군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마냥 당하기만 하던 신라는 5세기 들어 해상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자비왕은 즉위 6(463)에 담당관에 명해 전함을 대대적으로 수리케 하고, 지증왕은 6(505)에 선박이용의 제도(舟楫之利)를 정비했다. (삼국사기)

이사부가 바닷길을 건너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물을 두려워 하던 신라 수군으로선 엄청난 발전이며, 신라군에 바닷 싸움(해전)에서 자신감을 얻게 한 전투였다.

 

이사부가 우산국을 공격한 해는 지증왕 12(512)이다. 실직군주에 임명된지 7년후다. 실직군주에서 우산국 복속까지 7년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7년 동안에 이사부는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강릉의 예국을 공격하고, 동쪽 해로로 울릉도의 우산국을 복속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육상전투엔 강했다. 앞서 소지 임금땐 비열성(함경남도 안변. 북한에선 강원도)까지 공격하기도 했다. 다시 고구려군에 의해 포항 흥해까지 밀려나기까진 했지만, 신라의 육군은 동해안에서 고구려와 막상막하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부 이전의 신라는 해상전투에 약했다. 해상세력인 왜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했다. 왕궁이 포위되고, 수천명의 백성이 왜군에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 수군을 키워내 동해 제해권을 장악하려면 이사부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한때 동해 해상로를 개척한 실직국의 경험을 살려 전선과 수군 병력을 늘려야 했다.

실직군주에 임명된 이사부의 포부는 곧바로 동해를 내해로 만드는 일로 구체화된다. 실직 군주로 임명된지 7년후 이사부는 하슬라(강릉) 군주로 임명됨과 동시에 우산국(울릉도) 공격에 나서 성공한다.

 

이사부의 우산국복속 기사는 <삼국사기>에 두차례 나오고, <삼국유사>에도 실려있다. 두 사서에서 스토리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내용에 약간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두 사서에서 중요한 차이는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에 부임한후 우산국을 정복했는지, 우산국 정복을 한 후에 하슬라의 우두머리가 됐는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본기와 열전에서 모두 하슬라 군주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우산국을 정복했다고 하는데 비해, <삼국유사>에서는 우산국을 정복한 대가로 지증 임금이 이사부를 아슬라 주백(州伯)으로 삼았다고 했다.

두 사서의 이 차이로 인해 이사부 출항지를 놓고 강릉시와 삼척시가 다투기도 했다. 강릉시는 하슬라 군주로서 경포호 입구에서 출항했다고 주장하고, 삼척시는 오십천 하구에서 출항했다고 내세웠다.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기술대로 이사부가 우산국 복속에 앞서 하슬라 군주에 임명됐다고 하더라도, 강릉에 가자마자 대규모 선단을 제작하기 어려웠을 터이고, 실직 군주를 7년간 맡으면서 우산국 정벌에 관한 전투 준비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춘천에 소재하고 있는 이사부학회는 삼척시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사부가 삼척에서 출항한 또다른 이유는 울릉도의 정서(正西) 방향에 삼척이 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엔 울릉도의 위치가 명주(강릉)에서 정동(正東) 쪽 바다에 있다고 했지만, 울릉도를 정동으로 항해할 수 있는 곳은 강릉이 아니라, 삼척이다.

신라시대엔 항해술이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정방향 항해술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선 방향으로 항해하다가는 목표 지점을 놓치거나 조난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사부 함대는 정동쪽으로 방향을 잡아놓고 울릉도를 향해 진군했을 것이고, 그 출항지로는 삼척이 가장 적합했다.

 

울릉도와 삼척의 거리 /김현민
울릉도와 삼척의 거리 /김현민

 

우산국 정벌의 명분은 조공이다. 조공은 근대 이전에 중국 중심으로 한 동양의 지배 질서였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호해주는(字小) 관계를 통해 정치적 지배구조가 형성됐다. 조공(朝貢)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치는 행위였다. 이에 큰 나라는 작은 나라의 임금을 책봉하고,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막아줬다.

신라와 우산국은 소우주를 형성했다. 우산국은 이사부 이전에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며 신라에 조공했다. 우산국은 신라를 큰 나라로 모시고,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작은 나라가 힘이 세질 때 큰 나라에 대항하려 한다. 이때 큰 나라는 무력을 행사한다. 우산국이 신라에 대항했다. 해마다 신라에 보내오던 조공을 거부한 것이다. 우산국이 신라의 신하노릇 하기를 거부하며 맞선 것은 <삼국사기>에서는 지세의 험함’, <삼국유사>에서는 바닷물의 깊은 것을 믿었다고 한다. 울릉도를 한번 가보면 지세가 험하고 바닷물이 깊은지를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이 이야기는 또 우산국이 신라 수군을 깔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라는 오랫동안 해상세력인 왜의 공격에 시달렸고, 수군이 약했다. 그런 신라가 동해를 가로질러 공격해 올수 있을까 하는 교만과 오만함을 가졌을 것이다.

 

범선 코리아나호가 입항하기 직전의 울릉도 모습.(2018년) /이효웅
범선 코리아나호가 입항하기 직전의 울릉도 모습.(2018년) /이효웅

 

이사부 장군은 지혜로운 장수였다. 지세의 험함과 바닷물의 깊음을 믿고 덤비는 우산국 군졸들을 물리치기 위해 사나운 맹수를 끌어들였다. 나무로 깎은 사자(木偶師子)였다. 두 사서에서 이사부가 목우사자를 동원해 우산국 사람들이 공포에 떨어 항복했다는 대목에서 일치한다.

사자는 우리나라에서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이사부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사자를 끌어들였다.

그러면 이사부는 어떻게 사자를 알게 됐을까. 사자의 분포지역은 인도와 아프리카다. 불교와 힘두교에서는 사자를 영물로 받들어 숭배해왔다. 우리나라에는 불교 전파를 타고 사자상이 들어왔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시기는 우산국 정벌후 13년 후인 법흥왕 15(525)이다. 하지만 불교는 이미 신라에 들어와 있었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는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중략) 비처왕(소지왕) 때에 이르러 아도(阿道)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눌지왕(417~458) 때 신라의 지방에 불교가 들어왔고, 이차돈 순교로 공인되기까지 불교는 100년 가까이 민간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사부도 어린 시절에 불교에 접하면서 사자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우산국 사람들은 사자를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이사부가 전함에 목우사자를 가득 싣고 울릉도 해안에 접근해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리라고 위협하자, 어리석고 사나운 우산국 병졸들이 항복했다는 스토리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현재 울릉도의 주민은 1만여명. 1,500년전엔 1,000~2,000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인구에서 군대를 징발하면 수백명 정도. 이사부는 막강한 신라 수군을 이끌고 우산국을 침공했고, 우산국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을 것이다. 목우사자의 우화는 민간의 설화로 전해오다가 고려시대에 김부식과 일연이 사서를 집필하며 옮겨 적은 게 아닌가 싶다.

이사부가 나무사자를 만들어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낸 일화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목마에 비견된다. 트로이 목마는 수많은 군인들이 들어갈수 있도록 대형으로 제작됐지만, 나무사자는 군선에 실어야 했으므로 트로이 목마보다 규모가 작았을 터이지만, 우산국인들이 두려워 항복할 정도였으니, 상당한 크기로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지증왕 이후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는 기사가 사라진다. 그것은 이사부의 우산국 점령을 계기로 신라의 해상 전력이 강화됐고, 왜가 육지에 접근하기 앞서 바다에서 침공 세력을 차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왜의 침공에 대비해 신라 수군의 전쟁 억지력이 강화돼 더 이상 왜가 신라를 침략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풀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은 신라로서는 첫 해전으로 기록된다. 신라가 첫 해전에서 승리한 것은 그만큼 해상전력이 강화됐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신라가 동해의 해상주도권을 확보했다는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