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한반도와 비슷한 지정학적 고통
오키나와, 한반도와 비슷한 지정학적 고통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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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중국해와 태평양 사이를 가로막는 해양거점…중국에 맞먹는 해양면적

 

일본 오키나와(沖繩) 현은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鹿兒島)에서 타이완까지 140개 섬의 크고 작은 섬이 활()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열도다. 주섬인 오키나와를 비롯해, 다이도, 미야코, 야메야마섬과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다이위다오(釣魚島))까지를 포함한다.

전체 육지의 면적은 2,276으로 제주섬의 면적보다는 넓지만, 주섬인 오키나와 섬은 제주도보다 좁다. 인구는 140만명, 그중 100만명 정도가 오키나와섬에 살고 있다.

인구로, 육지 면적으로 치면 오키나와는 일본의 1%도 차지하지 못한다. 47개 행정구역 중에서도 하위권에 해당한다.

땅의 면적은 좁지만, 오키나와의 바다는 일본 해양의 30%를 차지한다. 오키나와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140개 섬이 연결하는 길이는 일본 주섬인 혼슈(本州)의 길이 1,500km에 해당한다. 한반도의 길이보다 길다.

일본의 육지면적은 중국보다 좁다. 중국의 육지 면적은 960인데 비해, 일본의 면적은 377,000에 불과하다. 중국의 땅덩어리는 일본의 25배나 넓다. 하지만 바다 면적으로 비교하면 중국은 일본에게 한수 아래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태평양 국가다. 200해리 관할수역 기준으로 하면 일본의 해양 영토는 386나 된다. 이에 비해 중국의 해양영토는 135, 일본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오키나와의 해상영토가 중국의 해상영토와 비슷하다.

 

오키나와 열도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열도 /위키피디아

 

일본은 전통적으로 해양국가다. 이에 비해 중국은 황화에서 발원한 대륙국가다. 중국이 뒤늦게 해양영토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이미 중국 바다의 절반 이상이 일본에 의해 포위돼 있는 상태다. 그것은 오키나와가 일본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중국이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남중국해의 암초에 콘크리트를 부어 섬으로 만들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바로 일본이 오키나와를 영토화해서 중국을 포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선 남중국해로 나가야 일본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위키피디아
일본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위키피디아
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GlobalSecurity.org
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GlobalSecurity.org

 

오키나와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한반도가 중국과 소련 대륙세력, 미국과 일본의 해양세력의 힘이 맞붙은 지정학적 이유로 임진왜란, 청일전쟁, 그리고 2차 대전후 독립과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열도인 오키나와도 대륙세력인 중국의 조공국이었고, 또다른 해양강국인 미국과 일본에 의해 주권이 빼앗겼다.

 

오키나와에는 일본에 귀속되기 앞서 류큐국(琉球國)이라는 왕국이 있었다. 일본 막부(幕府)에 종속되지 않고, 중국에 조공하고, 조선 왕조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독립왕국이었다. 류큐국은 중국과 일본, 조선 사이에 이른바 균형 외교를 취했다.

그러나 힘이 약한 나라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열강들의 힘의 균형이 깨질 때 나라가 존속의 기로에 서게 된다. 류큐국도 그런 나라였다.

오키나와 열도를 장악했던 류큐국의 역사 과정은 한국과 상당히 오버랩된다. 어쩌면 그 시기도 비슷하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명나라를 침공할 길을 열어달라며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에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류큐왕국은 조선침공을 위한 물자를 대달라는 도요토미 막부의 요청을 거부했다. 곧이어 일본열도의 강자로 부상한 도쿠가와 이에야(德川家康) 막부는 1609년 큐슈 가고시마현에 자리잡고 있던 사쓰마(薩摩)의 무사들을 동원해 류큐를 침공했다. 임진왜란 때 도와주지 않은데 대한 보복이었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다 류큐 나하항으로 가서 개항하도록 압박을 넣었다. 그로부터 20여년후인 후 일본은 1875년 일본은 미국이 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운요호(雲楊號)를 인천에 보내 조선으로 하여금 개항하도록 했다.

1875년 일본 유신정부는 군대를 보내 류큐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로부터 30년후인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에 의해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류큐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4년후인 1879년 류구국을 일본 영토로 만들었다. 일본은 류큐 국왕을 도쿄로 압송하고 그 곳에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류큐처분) 조선도 30년의 시차로 같은 길을 걸었다. 외교권 박탈 5년후인 1910년 일본은 조선을 합방했다. (한일합방)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4월 미군은 일본 본토에 진입하기 이전에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유일한 지상전을 벌였다. 사상자는 일본 본토인과 오키나와인, 미군을 합쳐 10만을 넘었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 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외에도 오키나와와 한국이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에 외교관들이 해외에 나가 독립을 호소하다 자결한 것도 조선과 류큐의 공통점이다. 2차 대전후 미군의 통치를 받았고, 지금도 수만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본토, 오키나와, 대만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포위하는 해상 방어망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 점도 같다.

어쩌면 분단된 모습도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오키나와는 1609년 사쓰마의 침공으로 북부 열도 일부가 빼앗겨 지금 가고시마현에 속해 있으므로, 행정적으로 분단돼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와 한국 사이에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은 독립했지만, 오키나와는 미 군정을 거쳐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의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의 하나인 오키나와현(沖縄県)이 바로 그것이다.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사이에 언어적, 문화적 차이가 크다.

오키나와어는 일본어와 비슷하지만, 본토(야마토)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본토 일본인들이 오키나와 민요를 들으면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일본 본토어와 류큐어 사이는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의 차이보다는 크고, 영어와 독일어의 차이에 가깝다고 한다.

문화적 차이도 크다. 류큐왕국은 막부와 별도로 중국 명-청왕조에 조공과 책봉관계를 유지했고, 조선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적어도 19세기말까지 류큐는 독립왕국이었다.

일본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조선과 류큐, 타이완을 합병한 후 식민지인들에게 일본어를 쓰게 하고 성씨도 바꾸게 했다. 그러나 한국은 독립하고, 타이완은 국공내전을 거치며 국민당 세력에 의해 별도의 주권을 형성하고 있다.

 

오키나와섬 항공사진 /위키피디아
오키나와섬 항공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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