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이공화국의 실패한 민족주의 운동
알타이공화국의 실패한 민족주의 운동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23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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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라트 영토였다가 1864년 중국에서 러시아로 이양…1918년 독립운동 실패

 

알타이산맥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중국, 몽골 4개국의 경계를 이룬다. 이 산맥은 우랄산맥과 함께 대륙의 물흐름을 가르는 대표적인 분수령이다. 알타이산맥은 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경계를 이룬다. 알타이(Altai)는 투르크어로 금()을 의미하며, 언어계통에서 알타이어족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알타이공화국(Altai Republic)은 알타이산맥 러시아 쪽에 있는 지방정부다. 면적은 92,600으로 대한민국과 거의 비슷하지만 인구는 20만명에 불과하다. 원종족은 투르크계의 알타이족이며 소련 체제 이후 러시아인이 더 많이 거주하고 있다.

알타이공화국은 산악지형이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높은 해발 4,506m의 벨루하산을 비롯, 고산준령에 갇혀 있다. 서쪽에는 러시아연방의 직할령인 알타이크라이(Altai Krai)가 접해 있다. 알타이크라이와 구분하기 위해 알타이공화국을 고르니알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르니(Gornyi)는 산이 많다는 뜻이다.

 

벨루하산과 호수 /위키피디아
벨루하산과 호수 /위키피디아

 

인적이 드믄 이 산악지역은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중국 청나라 땅이었다. 그 이전엔 서몽골족인 오이라트의 준가르제국의 영토였다. 1727년 캬흐타 조약이 체결될 때만 해도 준가르제국이 알타이산맥과 카자흐스탄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러시아와 서북국경을 확정하지 못했다. 1757년 준가르가 청의 건륭제에게 멸망한 후 청의 영토로 편입되어 우량카이(烏梁海)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가 청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러시아는 중국 변경을 더 이상 갉아먹지 못했다.

1840년 청제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후 변경의 국경관리에 소홀해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아이훈조약(1858), 베이징조약(1860)을 통해 아무르강 북부와 연해주를 집어삼킨 이후 중국 서북국경을 정리하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1864년 서몽골지역에 대한 국경협상이 진행되어 타르바가타이 조약(Treaty of Tarbagatai)이 체결되었다. 이때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서북지역을 사과 껍질 깎듯이 도려내 가져갔는데, 그 땅 가운데 지금 러시아에 남아 있는 것이 알타이공화국이고, 나머지는 카자흐스탄 영토가 되었다.

 

선지자 악-부르칸 그림 /위키디아
선지자 악-부르칸 그림 /위키디아

 

20세기초 러시아지역 알타이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465일 니콜라이 2세는 알타이 산중에서 칼미크족(오이라트)이 차르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전을 받았다. 차르 정부는 톰스크 총독에게 상황을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톰스크 관리들이 조사해보니 구체적인 반란징후가 보이지 않고 일부 민족종교의 과격한 주장만 있을 뿐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현지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이 알타이족의 배타적 운동에 겁을 내서 상황을 과장했다는 것이었다.

20세기초 알타이에는 부르칸교(Burkhanism)이라는 혼합종교가 탄생했다. 부르칸교는 티베트불교와 러시아정교, 몽골샤머니즘을 혼합해서 만들어졌다. 이 신생종교의 신은 악-부르칸(Ak-Burkhan)인데, ‘’(Ak)희다’(white), ‘부르칸부처’(Budda)의 알타이어였다. 흰 부처’(white Budda)란 의미다.

창시자는 쳇 첼판(Chet Chelpan)과 그의 수양딸 추굴 사록 챤딕(Chugul Sarok Chandyk)이다. 19044월 둘은 흰말을 타고 흰 옷을 입은 선지자를 보았으며, 그가 악부르칸이라는 것이다. -부르칸은 곧 오이라트의 칸이 나타나 과거 준가르제국 나아가 몽골제국의 영광을 되찾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신흥종교가 알타이족에게 급속도로 퍼졌다.

그들은 준가르제국의 최후의 칸 아무르사나가 나타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아무르사나(Amursana)는 오이라트의 호이트 부족의 족장으로, 갈단의 조카 체왕랍단의 외손자다. 그는 준가르의 칸 라마 다르자를 살해하고 다와치를 칸으로 옹립하며 준가르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와치와의 불화로 청나라에 항복해 청의 친왕(親王)에 책봉되었다. 1755년 청의 준가르 정벌에 부장군(副將軍)의 지위로 압장섰으나 청과 결별해 오이라트의 칸이 되려 하자 청나라의 토벌을 받았다. 그는 카자흐로 피신했으나 카자흐 동부 부족들이 청나라와 내통했기 때문에 다시 시베리아로 피신했다가 병들어 죽었다.

알타이족 사이에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르칸교는 아무르사나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미신을 사실인양 주입시켰다.

 

알타이족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정세가 혼란할 때 구체화되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내전기인 19183월 부르칸주의자들은 독립정부를 수립했다. 정부는 카라코룸 정부( Karakorum Government) 또는 알타이연방공화국(Confederated Republic of Altai)이라 했다. 광신도들은 칭기스칸 제국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알타이산맥의 소수민족은 아무리 내전 중이라도 러시아인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후 알타이는 백군에 점령되었다가 적군에 넘어갔다.

 

알타이공화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알타이공화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러시아에 다시 복귀하면서 알타이공화국엔 러시아인들이 많이 밀려왔다. 2014년 통계로 이 공화국에 러시아인이 56.6%이고, 알타이족은 34.5%로 두 번째로 밀려나 있다. 최대종교는 러시아정교가 주민의 27%이고, 텡그리주의, 부르칸 등 토착종교가 1%를 차지한다.

만년설과 호수가 발달되어 있어 러시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참조자료>

Wikipedia, Altai Republic

Wikipedia, Treaty of Tarbagatai

Wikipedia, Burkhanism

Wikipedia, Amurs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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