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②…깊이 패인 일본군의 상흔
거문도②…깊이 패인 일본군의 상흔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22.07.26 11: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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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동아시아 뱃길의 중심…영국·일본·러시아가 노렸던 섬

 

거문도는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뱃길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의 한 가운데에 있고, 태평양으로 출구가 열려 있는 곳이다. 또 거문도의 지형이 동도·서도·고도의 세 섬으로 섬 내의 바다(島內海)를 형성하고 있어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지형적 조건은 주변국으로 하여금 거문도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거문도의 위치 /네이버 지도
거문도의 위치 /네이버 지도

 

거문도에는 고대 중국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증거가 한나라 시대 화폐 오수전(五銖錢)이다.

19777월 한 주민이 가옥을 신축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모래를 채취하던 중 오수전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주변에 오래된 목선 부재로 보이는 나무 조각들이 함께 수습되어 난파선에 적재된 화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신고된 오수전은 모두 980점으로 상당한 규모였다.

오수전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발행된 중국 한나라 화폐로, 이 시기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거문도 오수전은 기원전에 우리나라 남쪽 해상의 뱃길이 활발했고, 거문도가 그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거문항 /촬영=이효웅
거문항 /촬영=이효웅

 

거문도에는 역사의 상처가 깊이 패어 있다. 1885~1887년 사이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 유적이 남아 있고, 일제말기에 만들어 놓은 군사시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한다.

194412월말 일본방위총사령부는 거문도 해안에 방어시설 구축을 지시했다. 현재 확인되는 것이 동도리 해안가 7곳과 산 중턱 두곳, 음달산 군사시설물, 불탄봉 관측시설 3, 거문리 참호시설, 교통호등 17이다. 대부분 시설은 거문도 주민이 동원되었으며 일부 시설물 구축을 위해 황해도등 각지에서 광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동도의 해안가에 있는 인공 터널의 크기는 길이 16.8m, 넓이 2.5m, 높이 2.5m. 내부는 콘크리트 벽의 두께가 30cm 이상으로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 이 시설물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인 1944년 말부터 1945년 광복 직전까지 거문도 주둔 일본군이 현지 주민 등을 강제 동원해 지은 것이다. 거문도가 중국과 일본 열도 중간의 길목에 위치해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거문도 일본군이 파놓은 인공터널 /촬영=이효웅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 발발 직후인 1905년 전략적 요충 거문도에 등대를 설치했다. 국내 최초의 등대가 1903년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라는 점에 비추어 일본이 일찍부터 거문도의 중요성을 인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 조선인들은 동도와 서도에 거주한 반면 일본인들은 주로 고도(古島)에 살았다. 일본 어부들은 거문도를 어업전진기지로 활용했다. 특히 일제는 해상케이블을 시모노세키에서 거문도를 거쳐 중국 다롄(大連)까지 이었다. 고도엔 지금도 일본식 건축물이 남아 있다.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영국은 일찍부터 거문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거문도 사건 88년전인 1797년에 영국 해군 프로비던스호의 함장 윌리엄 브로튼이 남해안을 지나가면서 이 바다의 지정학정 중요성을 알았을 것이다.

거문도를 서방에 처음 소개한 영국인은 1845년 영국해군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r) 함장이다. 벨처 함장은 해양탐사선 사마랑(Samarang)호를 이끌고 제주도에서 거문도 해역까지 1개월간 탐사한 후 귀국해 항해기 두권을 출판했다. 그는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서 거문도항을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 명명했다.

 

밖노루섬 /촬영=이효웅
밖노루섬 /촬영=이효웅

 

러시아 함대도 거문고에 들락거렸다. 러시아 예피미 푸챠친(Yevfimiy Putiatin) 제독의 함대가 영국의 점령에 앞서 세 차례(18541, 18572) 거문도에 기항했다. 그는 조선과의 통상을 원하는 러시아 차르의 뜻을 문서로 작성해 거문도 주민들에게 전달하면서 조선 조정에 전해주기를 요청했지만 섬사람들이 거절했다.

이 때 푸챠친 제독이 보낸 외교문서가 거문도의 거유 귤은(橘隱) 김유(金瀏) 선생(18131884)이 작성한 해상기문’(海上寄聞)에 수록되어 있다.

푸차친은 1857810일 두 번째로 거문도를 방문했을 때 거문도 주민으로부터 저탄소설치에 관한 허락을 받았다. 이는 국제법상 효력이 없었고, 조선조정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 것을 이용한 것이었으므로 무효였다. 어찌했던 러시아의 저탄소 설치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후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다.

 

거문도 안내도 /여수시청
거문도 안내도 /여수시청

 

거문도가 자랑하는 대문장가 김유 선생은 개항기 거문도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김유는 1814년 거문도 유촌 귤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30세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가다가 전남 장성에 이르러 당대의 내로라는 유학자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만나 선생의 뛰어난 학문을 접하고 결심을 바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거문도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했다.

김유를 모신 사당이 동도리 유촌마을에 있는 귤은당(橘隱堂)이다. 정면 3, 측면 1칸 규모의 사주정자(四柱亭子)형 기와집이다. 주위로 낮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현판은 기정진의 후손인 기우몽(寄宇蒙)이 썼다.

 

귤은당 /촬영=이효웅
귤은당 /촬영=이효웅
귤은당 /촬영=이효웅
귤은당 /촬영=이효웅
유촌교회 /촬영=이효웅
유촌교회 /촬영=이효웅

 

거문도 등대는 1905410일 세워졌다. 등탑의 높이가 6.4m이며 흰색 원통형으로, 벽돌과 콘크리트가 혼합된 구조물이었다. 20068월 새롭게 신축했다. 33m의 백색 육각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되어 있다. 등탑에는 거문도와 백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등대 절벽 끝에는 관광객들이 바다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관백정이 설치되어 있다.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거문도의 이모저모 /촬영=이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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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샘 2022-07-28 11:56:38
러시아 영국 등의 침탈 야욕을 견뎌낸 거문도의 기개를 확인합니다**
감사드리고요** 오늘도 효웅님의 해양보도 탐사에 안전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