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에 끝까지 복종하지 않은 축치족
차르에 끝까지 복종하지 않은 축치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7.2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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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축치족, 수차례의 러시아 원정에도 버텨내…평화협정으로 공존 인정

 

시베리아 가장 동쪽에 있는 러시아 행정구역은 추코카 자치주(Chukotka Autonomous Okrug). 이곳의 주요 원주민 종족이 축치족(Chukchis)이다. 축치와 추코카는 어원이 같다.

이곳에 사는 축지족은 제정러시아가 1917년 혁명으로 몰락하기까지 복종하지 않은 유일한 원주민이다.

그들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침략해 올 때 창과 화살의 원시적 무기로 총포로 무장한 코사크에 대항해 싸웠다. 그들은 죽으면 자기 종족으로 다시 환상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축치인은 스스로를 진정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리그오 베틀란이라 불렀다. 그들은 툰드라에서 주로 순록을 유목하는 순록축치와 해안에 북극곰, 해양포유류 등을 어획하는 해안축치의 두 그룹으로 분류된다. 축치란 말은 순록이 풍부하다’(rich in reindeech)란 의미의 차우추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이 축치인을 만난 것은 1640년대초다. 코사크는 1643년 콜리마강에 접근해 축치족의 존재를 알았고, 1649년 세묜 데즈네프가 베링해협을 돌아 아나디르강에 표착하면서 축치족과 접촉했다. 러시아는 축치반도 태평양 해안에 아나디르스크(Anadyrsk) 요새를 만들고 그곳에 600명의 병사와 1개 포대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코사크들은 축치족들에게 모피와 토산물을 야삭(세금)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축치족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전적이었다. 러시아도 처음 50년 동안에는 축치와 싸워서 이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해 싸움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캄차카 반도가 개척되고 후에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가 열리면서 축치 거주지를 지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특히 야쿠츠크에서 캄차카반도로 가려면 축치족의 거점인 아나디르스크를 지나야 했다.

1700년대가 되면서 러시아가 필요에 의해 축치족 제압을 시도했다. 첫 공격이 1701년 축치반도의 축치족과 캄차카 반도의 코랴크족(Koryaks)를 상대로 전개되었다. 코랴크족은 비교적 협조적이었으나, 축치족은 서양인들에게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1708, 1709, 1711년에 연이어 원정대를 보내 축치족을 공격했다. 축치 사람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러시아의 공격은 번번히 실패했다. 그들은 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총소리가 나면 그 자리에서 도망하지 않고 적병에게 화살을 쏘았다. 용맹스런 코사크마저도 축치들의 용기에 감탄했다.

 

축치족의 분포(2010년) /위키피디아
축치족의 분포(2010년) /위키피디아

 

축치 전사들의 용감은 그들의 신앙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있다. 그들의 샤머니즘은 자발적 죽음을 미화한다.

한국외대 김민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축치족은 자발적 죽음이라는 관습을 최근까지 유지해 왔다. 자발적 죽음은 노인 또는 중환자가 아들이나 가까운 친척 또는 친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고, 그런 부탁을 받은 사람은 그 청을 들어줄 의무를 가지게 되는 관습이다. 축치족에게 자발적 죽음의 주요 동기는 노쇠와 질병인데, 그 배경엔 독특한 내세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노환과 질병에 의한 죽음은 악귀 켈르가 사람의 영혼 또는 장기를 빼앗아 가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게 켈르에게 영혼을 빼앗겨 죽은 사람은 켈르처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켈르에게 영혼을 빼앗기기 전에 자발적으로 죽을 경우 켈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축치족은 또 조상의 영혼이 자기 집안에 아기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악귀 켈르에게 영혼을 빼앗겨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귀신이 되기보다는 자발적 죽음 을 통해 자신의 집안에 다시 환생하기를 원했다. 또한 축치족은 자발적으로 죽은 자들이 천상세계로 가서 좋은 대접을 받는다고 믿었다, 이런 신화와 내세관을 가졌기 때문에 축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축치족 가족(1816년 그림) /위키피디아
축치족 가족(1816년 그림) /위키피디아

 

축치들이 끝까지 저항하자 1725년 표트르 대제는 원정대에 축치를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차르는 아파나시 쉐스타코프(Afanasy Shestakov)를 대장으로 하는 원정대를 극동에 파견했는데 17303월 그는 파렌강 근처에서 축치 전사에 살해되었다.

차르는 이듬해 1731년 잔혹하기로 유명한 드미트리 파블루츠키(Dmitry Pavlutsky)를 파견했다. 파블루츠키는 초토화전술을 썼다. 그의 전투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축치족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파블루츠키의 부대는 마을을 습격해 축치인을 대량살상하고 가옥을 불지르고 순록을 모두 내쫓고, 여자와 어린이는 잡아다 노예시장에 팔았다.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다. 러시아인에게 축치족은 순록과 다름없는 사냥 대상일뿐이었다. 첫 전투에서 축치 450명이 죽었고, 그 다음에 300, 또 다음에 40명을 죽어나갔다.

러시아의 파괴전략에 유가키르족, 코랴크족은 돌아서 침략자에 부역했다. 축치는 어제까지만 해도 툰드라에서 동고동락하던 종족의 이탈을 배신으로 규정하고 적의 무리와 동일시했다. 축치는 러시아인, 코사크, 유가키르족, 코랴크족 모두를 상대로 싸웠다. 1738년 아나디르 근처에서 코랴크족을 대량살육하고 순록을 약탈했다.

1742년 예카테리나 2세는 축치족으로 섬멸하라는 칙령을 내려보냈다. 파불루츠키는 이미 그 전략을 수행하고 있었다. 축치의 항쟁은 끈질겼다. 전세가 불리할 때 그들은 종족 신화에 따라 가족들을 죽이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1747312, 500명의 축치 전사들은 아나디르스크 목책을 공격했다. 바블루츠키의 병력은 코사크 96, 코랴크 35명 등 도합 131명이었다. 파블루츠키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에 맞서 용감한 축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러시아측이 밀리기 시작했다. 쇠사슬 갑옷을 입고 있던 파블루츠키는 요새 밖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축치들이 그를 보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살인마를 에워 싸고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그의 두개골을 가져가 오랫동안 전시했다.

이 전투는 18766월 미군이 인디언 부족연합에 패배한 몬태나 리틀빅혼 전투에 비유된다.

 

1750년 러시아는 축치족을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아나디르스크 요새를 유지하는데 138만 루블이 소요되었는데, 그 지역에서 걷는 세금은 29,150루블에 불과했다.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원정대장 2명을 희생하면서까지 극동의 전투적 종족을 제압할 명분이 약해졌다.

샹트페테르스부르크의 조정은 전략을 수정했다. 1778년 양측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의 내용인즉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며, 상호간에 평화적인 무역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이후 매년 콜리마강 하류에서 시장이 열렸다. 러시아인들은 정상적으로 돈을 주고 축치의 모피를 사갔다. 축치도 모피를 주고 담배와 생활필수품을 바꿨다. 1815년 러시아는 정교 선교사를 축치에 파견했다. 이 조치도 성공했다.

축치족은 러시아제국이 혁명으로 뒤집어질 때까지 야삭을 내지 않았다. 또한 차르의 신민이 되길 거부했다. 러시아 제국은 축치 반도를 영토로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지배하지는 못했다.

 

추코카 자치주 /위키피디아
추코카 자치주 /위키피디아

 

츅치의 거주지 추코카 주는 737.700로 한반도의 4배에 달한다. 전체 인구는 5만명인데, 이중 러시아인이 52%를 차지하고, 축치족은 26.5%를 차지한다. 추코카 자치주의 수도는 아나디르(Anadyr)이며 인구는 13,000여명이다.

1922년 소련이 출범한 이후 축치는 러시아 연방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러시아내 축치족의 인구는 16,000명에 이른다.

 


<참고자료>

Wikipedia, Chukchi people

Wikipedia, Chukotka Autonomous Okrug

Wikipedia, Dmitry Pavlutsky

김민수, 축치족의 관습 소위 자발적 죽음과 내세관, 한국시베리아연구, 2012 161

윤성학, 모피로드, 2021ㅡ 케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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