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⑤…하슬라 군주, 강릉으로 북진
이사부⑤…하슬라 군주, 강릉으로 북진
  • 아틀라스
  • 승인 2019.06.2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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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군대, 삼척에서 강릉으로 영토확장…환동해권 지배

 

이사부는 502년 실직 군주의 명을 받은 후 7년후 512년 하슬라 군주로 부임한다. 군주(軍主)의 직책이 중앙군(京軍)의 총책임자였으므로, 주둔지가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실직군주였을 당시 이사부의 관할 구역이 경북 동해안에서 삼척까지였다가 7년후 하슬라 군주가 됐을 때 관할 영역이 강릉으로 넓혀졌다는 뜻이다. 기록이 없지만, 7년 사이에 신라군이 고구려와 그 동맹세력(말갈)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 삼척에서 강릉까지 북진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이사부의 하슬라 군주 부임과 우산국 정벌이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는 사실에는 일치한다. 하지만 선후의 문제에서 <삼국사기>는 하슬라 군주 부임 직후에 우산국 정벌이 이뤄졌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선 우산국 정벌의 공로로 하슬라(아슬라) 주백에 보임됐다고 쓰여 있다.

어찌했든 이사부는 7년간 실직에서 육상 전투력과 해상 전투력을 동시에 키워 동해 제해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강릉 이북으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유명 장수 가운데 해상전과 지상전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사부는 해전과 육상전에서 동시에 승전하는 장수로 기억될 것이다.

 

강릉 단오장의굿당 /문화재청
강릉 단오장의굿당 /문화재청

 

강원도 동해안엔 예나, 지금이나 산물이 풍부하지 못하다. 해안의 길은 평이한 육로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동해안에는 곳곳에 백두대간의 지맥이 내려와 일직선상의 행로가 평탄하지 않다. 7번 국도를 따라 운전하다 보면 산을 넘고 터널을 지나야 한다. 동해안은 절벽과 높은 산으로 막혀 있어 신라인들이 우마차로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북과 강원도 해안에는 태백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하천(남대천, 오십천등)의 어귀나 해류가 막아놓은 석호(청초호, 경포호) 주변에 토지를 일구거나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부락이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이어져 있다. 이사부는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는 부락들을 해상 수단을 이용해 지배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동해안은 과거 예국(濊國)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동지역은 예족, 영서는 맥()족이 거주했다. 삼척, 울진, 영해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한 실직국도 예족의 한 갈래였다. <삼국사기>에는 말갈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리적으로는 예와 맥의 영역과 오버랩핑된다. 따라서 예, , 말갈이 미분화한 상태에서 강원도, 경북 동해안, 경기도 서부지역에 거주하며, 부족국가를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가 실직, 하슬라 군주를 맡으면서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신라의 영토를 강원도 북부까지 확장해 예족을 지배함과 동시에 동해안의 해상 부족을 통치권에 넣어 반도의 동해안은 물론 해의 영유권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주에서 강릉까지 육지를 선으로 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점으로 지나는 반원형의 육상, 해상 지배권을 확장했다는 의미다.

 

북해의 길 /그래픽=김현민
북해의 길 /그래픽=김현민

 

신라는 일찍부터 동해안 루트를 개발해 운영해왔다.

이사부가 북쪽 국경과 동해를 거쳐 공격해오던 예(말갈)와 왜의 루트를 차단했기에 신라가 서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이사부의 실직군주 부임 이전에 경주에서 강원도 고성까지의 북해항로가 있었다는 사실이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에는 눌지왕의 동생인 보해(삼국사기엔 복호)가 동해안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경주로 돌아온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사는 이미 북해의 길(北海之路)’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제상(堤上)은 왕의 명을 받고 곧장 북해의 길(北海之路)’로 떠났다. 옷을 바꾸어 입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寶海)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갈 날짜를 약속했다. 그리고 먼저 515일에 고성(高城)의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보해는 병을 핑계로 대고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도망쳐서 고성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보내어 뒤쫓게 하였는데 고성에 이르러 보해를 따라잡았다. 그렇지만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어 모두들 화살촉을 뽑고 쏘았다. 그래서 드디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삼국유사 기이, 내물왕과 김제상)

 

박제상(삼국유사엔 김제상)은 왕의 아우인 복호(卜好)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강원도 고성으로 길을 떠나 고구려의 수도(국내성)로 들어가 복호의 탈출을 도왔고, 복호는 고성의 포구에서 신라측이 마련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는 스토리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가 되기 이전에 신라의 배가 강원도 북쪽까지 항로를 읽고 있었다는 얘기다. 예국을 조공국으로 삼아 간접 지배를 하면서 신라의 선박은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북부 또는 함경도까지 운항하며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길을 따라 박제상은 고구려 수도로 입성했고, 눌지왕의 동생이 탈출한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길은 육로로는 백제 또는 맥족(또는 말갈)이 막고 있었고, 바닷길은 가야와 백제에 막혀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와 교역을 하든 전투를 벌이든 그 길은 바다를 이용한 동해안 해상로였다.

 

따라서 이사부가 하슬라(강릉) 군주로 임명되자 바로 우산국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예(또는 말갈)과 왜, 우산국 사이에 있을수 있는 동맹의 고리를 끊고, 동해를 신라의 바다, 즉 신라해(新羅海) 만들기 위해서였다. 후에 진흥왕이 함경남도 마운령, 황초령까지 영토를 넓히는데에 이사부의 동해 경영이 힘이 됐을 것이다.

군주(軍主)의 위치는 전략 변경에 따라 옮기기도 한다. 이사부가 지증왕 13(512)에 하슬라(阿瑟羅)의 군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증 임금이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동해안 군사 거점을 삼척에서 강릉으로 북쪽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산국(울릉도) 정벌에 성공하고, 실직군주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이사부를 하슬라 군주로 발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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