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차카반도의 전사집단 코랴크족
캄차카반도의 전사집단 코랴크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03 12: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순록과 함께 생활하는 종족…야삭 징수를 거부, 러시아에 끝까지 저항

 

코랴크족(Koryaks)은 캄차카반도 북부와 오호츠크해 연안에 거주하는 고아시아족이다. 시베리아 동북쪽에 위치한 추코트카의 축치족과 언어 계열이 같고 고대에 두 대륙이 붙어 있을 때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를 육로로 이동하던 종족의 하나로 분류된다. 2010년 러시아 센서스에 코랴크족의 인구는 7,953명으로 집계되었다.

 

코랴크족 분포도 /위키피디아
코랴크족 분포도 /위키피디아

 

코랴크족은 순록과 함께 하는 사람이란 의미다. 순록(kor)이 그들의 생업이고 생활 그 자체다. 코사크 원정대장 블리디미르 아틀라소프가 1695년 캄차카반도를 공격할 때 코랴크를 처음 충돌했고, 그후 코랴크족은 러시아와 그 앞잡이들과 무한한 투쟁을 벌여왔다.

코랴크족은 6~7개 가족이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부족장 또는 추장이 있긴 하지만 명목 상이고 실제 권력은 없다. 그들은 합의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소집단에 의한 평등주의가 오래전부터 실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집단은 순록 유목에 적합했다. 그들은 순록이 다치지 않게 뿔을 잘랐으며, 순록에 마구를 채워 썰매에 연결해 이동수단으로 삼았다. 요즘 코랴크족은 스노모빌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순록 썰매가 이용되고 있다.

그들은 순록이 주식이었고, 순록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고, 순록 피와 젖, 골수를 마셨다. 순록의 간과 심장, 허파, 혓바닥은 그들에게 별미였다. 순록으로 모자라는 영양소는 강에서 잡은 연어와 야산에서 채취한 딸기류, 나무뿌리 등으로 보충했다. 오늘날 코랴크족은 순록을 팔아 그 돈으로 외부에서 들여온 빵과 시리얼, 통조림을 사서 먹고 있다.

코랴크족의 전통가옥은 동물가족, 주로 순록 가죽으로 만든 텐트다. 현대에는 시멘트 또는 콘크리트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지만.

 

추코트카-캄차카 언어분류도 /위키피디아
추코트카-캄차카 언어분류도 /위키피디아

 

코랴크족은 축치족과 함께 제정러시아에 저항한 종족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용맹스러웠다. 차르의 앞잡이 코사크들은 코랴크족에게서 야삭을 징발하려 했지만 그들은 18세기말까지 차르에 세금납부를 거부했다.

코랴크는 코사크들도 무서워했다. 처음 코사크들이 캄차카반도로 들어갔을 때 그들의 무기는 칼과 창, 활이 고작이었다. 코랴크는 총을 들이대고 모피를 내놓으라는 서양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틀로소프의 캄차카 탐사(1697~1699)는 코랴크족에겐 외부인의 침공이었다. 적들은 코랴크의 순록을 약탈했고, 야삭을 징발했다. 코랴크족들은 산속으로 도주했고, 코사크들은 야영지에 남아 있던 여인과 어린애들을 집단살해했다.

아틀로소프 이후 1703~1715년에 러시아인들은 캄차카에 정주하면서 코랴크와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인들은 저항하는 코랴크를 수용하기 위해 볼셰레츠키와 아클란스키에 감옥을 만들었고, 코랴크족은 수시로 감옥을 공격해 코사크 200여명을 죽였다. 코사크는 보복으로 코랴크 마을을 공격해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다. 코사크 전사들은 어쩔수 없이 후퇴할 때 제 손으로 가족을 죽이고 퇴각했다. 코사크와 코랴크는 서로 죽고 죽였다. 침략자와 방어자의 차이는 무기였다. 총을 가진 코사크가 우세했다. 수세에 몰린 코랴크도 총을 다루는 기술을 습득해 코사크의 총을 빼앗거나 훔쳐 대항했다.

전통적인 코랴크 전사(1900년경) /위키피디아
전통적인 코랴크 전사(1900년경) /위키피디아

 

러시아인들이 캄차카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거의 지워져 있다. 코랴크족은 문자가 없었기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러시아 또는 코사크들은 그들의 범죄를 삭제하거나 축소해서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1744년 코랴크 부족장 투이나와 그 부족이 야삭 징수자에게 저항하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생활 8년째이던 1752년 코랴크 죄수들은 폭동을 일으켜 감옥을 점거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대포로 감옥을 포격해 코랴크 수감자들을 모두 불에 타죽게 했다.

1751400명의 코랴크족이 요새 건설에 강제 동원되어 노역을 제공했다. 요새 건설이 끝날 무렵 러시아인들은 300여명의 코랴크 인부를 집단살해했다. 족장 알락이 저항했다는 이유였다.

러시아는 코랴크족 말살정책을 썼다. 아틀라소프가 캄차카에 원정가던 무렵 1700년에 1~11,000먕ㅇ로 추정되던 코랴크족은 1800년에 4,800명으로 급감했다. 러시아인, 코사크가 살해한 것도 이유였고 러시아인들이 묻혀온 여러 전염병균이 인구급감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게 해도 코랴크는 살아 남았다. 차르정부는 축치족과 마찬가지로 코랴크도 굴복시킬 수 없는 종족으로 판단했다. 차르 정부는 코랴크에게 유연한 정책을 취했다. 동유럽의 전제정권은 극동아시아의 조그마한 부족장에게 보드카와 담배를 선물했다. 러시아는 코랴크 부족의 지위를 유지해 줄 것을 약속했고, 자치를 허용했다. 야삭을 강요하는 대신에 시장을 통해 거래하도록 허용했다.

 

코랴크족과 무녀(1900년경) /위키피디아
코랴크족과 무녀(1900년경) /위키피디아

 

소련 시절에 공산정권은 코랴크족에게 집단화를 강제했다. 코랴크는 원래부터 각자 대등한 지위에서 평등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집단화는 그들에게 맞지 않았다. 당이 생산량을 결정하고 지시하고 그에 맞춰 생산하는 방식은 자연에 몸을 맡겨 생활해온 종족에게는 맞지 않았다. 집단화에 저항하는 사람은 미국 또는 일본의 스피아로 몰려 처형되거나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다. 스탈린 시기인 1940년대 코랴크족의 60%가 집단농장에 소속되었다.

코랴크족 거주지는  소비에트 시절부터 코랴크 자치주(Koryak Autonomous Okrug)로 비교적 높은 수준의 자치성을 확보했는데, 2007년 남쪽의 캄차카주(Kamchatka Oblast)와 합병해 현재는 캄차카 크라이(Kamchatka Krai) 내의 지방조직(Koryak Okrug)으로 격하되었다.

 


<참고자료>

Koryaks - The Red Book of the Peoples of the Russian Empire

“It is hard to handle the Koryaks using firing arms”

Wikipeida, Koryaks

윤성학, 모피로드, 2021, 케이북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