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과 오호츠크해 가르는 쿠릴열도
태평양과 오호츠크해 가르는 쿠릴열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2.08.05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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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개의 화산섬…원주민 아이누족 의사와 상관 없이 러-일 영토분쟁

 

쿠릴 열도(Kuril Islands)는 일본에서 치시마(千島)라고 한다. 러시아와 일본이 자국령이라고 주장하는 열도인데, 원주민은 아이누족이다. 수천년을 살던 주인은 아무 말이 없고, 외부에서 온 강대국이 제 땅이라고 우기는 곳이다. 현재는 러시아령으로 사할린주에 속해 있다. 일본은 쿠릴열도의 남쪽 4개 섬이 홋카이도에 부속한 섬이라고 주장한다.

 

쿠릴 열도는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서 러시아 캄차카반도 남단까지 활처럼 이어진 열도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길이는 대략 1,300km에 이르며, 이 열도로 인해 안쪽의 오호츠크해와 바깥쪽의 태평양이 갈라진다. 섬은 모두 56개로 구성되었으며, 총 면적은 1503,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21,501명이다.

태평양 연안의 불의 고리’(Ring of Fire)에 포함되어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거대한 땅덩어리(plate)이 양쪽에서 밀려오며 열도가 생겼고, 열도 동쪽에 쿠릴해구가 형성되었다. 100개의 화산이 있으며, 이중 40개가 활화산이다. 온천과 화산 분기공이 흔하고, 섬 안에 칼데라 호수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은 냉대, 북쪽은 한 대의 툰드라 기후로 춥다. 겨울에는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안개가 많이 끼어 습하다. 작물 재배가 어려워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쿠릴열도의 영토분할 변경 /위키피디아
쿠릴열도의 영토분할 변경 /위키피디아

 

열도의 원주민은 아이누족이다. 아이누족은 혼슈,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 캄차카남부에 살던 종족으로, 일본족에 의해 점점 밀려 에도시대엔 홋카이도에 주로 살았다. 에도 시대에 혼슈 북쪽의 영주였던 마쓰마에(松前)씨가 홋카이도를 자신들의 영지라고 주장했으나, 실제 주인은 아이누였다.

일본은 도쿠가와 시대인 1644년에 만든 지도(正保国絵図)에 홋카이도 북동쪽에 39개의 열도가 그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지도에 그려 넣었다고 그 땅이 자기네 것이라 할수 없다. 일본이 홋카이도를 완전하게 영토화한 것은 메이지 시대(1868~1912)였다.

 

러시아가 쿠릴열도를 인지한 것은 1698년이었다. 캄차카반도를 탐험한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가 캄차카반도 남단 로팟카곶(Cape Lopatka)에서 쿠릴열도를 보았고, 열도의 북쪽 끝의 섬이 그의 이름을 따 아틀라소프 섬이라고 명명되었다.

아틀라소프는 쿠릴열도를 직접 탐험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진행된 열도 탐험은 그와 연관이 있다. 아틀라소프는 1711년 살해되었는데, 주범이 폴란드 출신의 이반 코지레프스키(Ivan Kozyrevskii)였다. 코지레프스키는 체포되었으나, 쿠릴 열도를 탐험할 경우 사면한다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1711년 코지레프스키는 33명의 대원들과 함께 쿠릴열도 북쪽의 슘슈섬에 도착해 탐사한 다음, 그 남쪽의 파라무시르섬에 상륙했다. 코지레프스키는 그후 다시 체포되었으며, 쿠릴열도 탐험은 다른 사람에 의해 계속되었다. 러시아 조정에서는 쿠릴열도가 일본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고 귀족과 상인의 관심을 끌었다.

감옥에 같혔던 코지레프스키는 탈출해 비투스 베링을 만나 자신이 탐험한 쿠릴열도에 대한 스케치와 주민들의 관습에 대한 세부사항을 건네 주었다. 그의 조사를 토대로 베링 탐험대의 일원인 스판베르그 탐사대는 1738년 우르프섬까지 도달해 31개 섬을 확인하고, 쿠릴 최남단의 시코탄섬을 확인했다.

 

쿠릴열도의 아이누족 /위키피디아
쿠릴열도의 아이누족 /위키피디아

 

17786월 홋카이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무역상이 처음으로 만났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홋카이도는 일본 영토로 굳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1787년 러시아 정부는 홋카이도를 포함해 쿠릴열도의 21개 섬을 자신의 영토로 표기했다.

북쪽에서 러시아인들이 어슬렁거린다는 소식을 들은 에도 조정은 서둘러 홋카이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쿠릴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려 했다. 1803년 에도 정부는 이투루프와 우루프 사이에 아이누인이 이동하는 것을 금지했다.

1847년 미국의 포경선이 쿠릴열도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미국의 페리 제독은 포경선의 정박을 위해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다. 미국의 함포외교에 1853년 일본은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고 항구를 열었다. 그 틈에 러시아는 일본에 접근해 쿠릴열도의 영토문제를 협상했다.

18552월 일본과 러시아는 시모다(下田)조약을 체결해 쿠릴열도에서 두 나라 국경을 이투르프와 우르프 섬 사이로 정했다. 서양세력과의 협상력이 떨어졌던 시기여서 일본으로선 불리한 조건으로 체결된 조약이었다.

일본은 그후 더 이상 러시아의 남하를 방치할수 없다고 판단해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 사할린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쿠릴열도 전체를 차지했다.

 

쿠릴열도 우시시르 섬의 칼데라호 /위키피디아
쿠릴열도 우시시르 섬의 칼데라호 /위키피디아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1945년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다.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소련은 그해 8월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쿠릴열도는 소련령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쿠릴열도의 규정이 모호하다며 남쪽 4개 도서의 반환을 요구했다. 일본이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북방 4개도서는 이투루프(擇捉島), 쿠나시르(國後島), 시코탄(色丹島), 하보마이(齒舞諸島).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열도 영유권 분쟁은 그 곳에 살던 아이누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패권의 전리품으로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Kuril Islands

Wikipedia, Kuril Islands dispute

Wikipedia, Ivan Petrovič Kozyrevskij

윤성학, 모피로드, 2021, 케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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