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싯다르타, 부처를 향한 깨달음의 여정
헤세의 싯다르타, 부처를 향한 깨달음의 여정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8.0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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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와 고타마의 분리…다양한 인생 경험 거쳐 깨달음을 얻는 과정 그려

 

독일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1922년에 발표되었으며, ‘인도의 시’(Eine Indische Dichtung, An Indian Poem)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소설은 싯다르타와 고타마 부처를 분리해 다른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깨달음의 과정을 전개했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인도 귀족 바라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깨달음을 찾아가는 인물로 등장하고, 고타마는 해탈한 완성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제 고타마 싯다르타를 한 사람인데, 헤세는 인간 싯다르타와 성인 고타마를 떨어뜨려 다른 사람으로 가정한 것이다.

 

청년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깨달음을 찾아 고행길에 나선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사문으로 3년간 수행하다 고타마의 설법을 듣게 된다. 친구 고빈다는 고타마의 설법에 감동받아 그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싯다르타는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야 한다며 고타마 세존에 귀의하지 않는다. 젊은 싯다르타와 완성자 고타마의 논쟁이 흥미롭다.

책표지(민음사)
책표지(민음사)

 

싯다르타가 고타마 부처에게 말하였다. “결코 어디에서도 끊기지 않은 하나의 사슬, 즉 인과응보로 묶여진 하나의 영원한 사슬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조그마한 문제가 있음으로써, 이 조그마한 균열이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단일한 세계 법칙의 전체구조가 지금 파괴되고 폐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타마는 싯다르타의 말을 조용히 들은후 말하였다. ”그대는 그 가르침 안에서 한 틈, 한 결함을 찾아 내었소. 앞으로 그것에 대하여 계속 깊이 생각하여 보는 게 좋겠구려. 하지만 지식욕에 불타는 그대여, 덤불처럼 무성한 의견 속에서 미로에 빠지는 것을 말 때문에 벌어지는 시비 다툼을 경계하시오. 가르침의 목적은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저 세상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아니오. 그 가르침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소. 그 목적은 번뇌로부터의 해탈이오. 고타마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오.“

젊은 삿다르타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고타마는 반쯤 미소를 띤채 의연하게 밝고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 딴 세상에 살고 있는 싯다르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작별을 고하였다. (민음사, p53~57)

 

싯다르타는 고타마 부처와 친구 고빈다를 남겨두고 기원정사를 떠났다. 그는 자아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극복할수 없었고, 단지 그것을 기만할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수 있었을 뿐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단 한가지 원인, 딱한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P60~61)

그는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산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의 비밀을 알아 내야지라고 생각했다.(p62) 의의와 본질은 사물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던 것이다.(p63) 싯다르타의 눈은 차안(此岸)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나, 그는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찾지 않았다.(p72) 이 모든 것은 예전에도 항상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태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런 것에 끼어든 일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런 것에 끼어들었으며, 그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p73)

 

싯다르타는 사변적인 가르침으로는 해탈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정신적인 방황을 하게 된다. 정신세계에 머물면서 잊고 있던 또다른 자아, 즉 감각본능의 세계에 있는 자아를 발견할 것을 시도한다.

싯다르타는 본능의 세계를 대변하는 기생 카말라를 알게 되고, 상인 카마스와미 밑에서 상인으로 살아간다. 사랑의 환희와 막대한 부를 누리지만 궁극적인 진리는 결코 현세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또다시 생의 허무를 느낀다.

여러해가 흘러가면서 싯다르타는 무사인일한 생활에 휩싸였다. 그는 부자가 되었고, 자신의 집과 하인들을 소유하였으며, 교외의 강가에 정원도 갖게 되었다. 싯다르타의 영혼 속에 세속의 나태함이 뚫고 들어왔으며 그것들이 서서히 그의 영혼을 메웠다. 그는 서서히 부자들이 잘 걸리는 영혼의 병에 걸렸다. 그는 세상이라는 맛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는 쾌락, 욕구, 태만, 탐역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는 노름에 빠져버렸다. 노름에 건 판돈은 파렴치하다고 할 만캄 어머어마한 거액이었다.

마치 너무 많이 마셔 댄 사람이 먹고 마신 것을 고통스러워 하면서 다시 토하여 버리고 나면 속이 가벼워지고 시원해져 상쾌감을 느끼듯이, 그는 고질적인 습관, 이러한 무의미한 생활 전체와 자기 자신의 무거운 집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해 지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바로 이런 유희가 윤회라는 것이다. 그때 싯다르타는 이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자기가 이 유희를 더 이상 계속할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런 것들과도 관계를 청산하였으며, 이것들도 그의 내면에서 죽어 버렸다. 그는 일어서서 망고나무에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집, 아늑한 거실과 침대, 그리고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생각났다. 그는 이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였다.

 

 

그는 자신이 온통 구토감과 비참한 심정으로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마저 미련없이 내던져 버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 강가의 야자나무 밑에서 다시 제정신이 들었으며, 성스러운 말인 옴(Om)을 입에 올리자 갚은 잠에 골아떨어졌다가 이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 보게 되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경이로운 잠에서 깨어난뒤 이 찬란한 시간, 온몸이 온통 옴으로 충만되었다. 잠을 자는 동안 옴의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매혹적인 현상이 본질인 것이다. 예전에는 마음이 너무나 병들어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이건 사물이건 아무 것도 사랑할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다.(p140) 탕아 싯다르타, 탐욕가 싯다르타는 죽었다. 그런 싯다르타는 죽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태어났다.

싯다르타는 강물 속에 빠져 죽으려 했다. 피곤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그 옛 시다르타는 이 강물 속에 빠져 죽었다.

 

그후 고뇌의 세계에서 벗어난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뱃사공이 된다. 싯다르타는 강에서 경청하는 법,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 활짝 열린 영혼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견해도 없이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배웠다.

나의 인생도 한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전생들도 결고 콰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梵天)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묻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p155)

 

뱃사공으로 지내던 어느날 싯다르타는 한때 정부였던 카말라를 만난다. 카말라는 싯다르타의 아들과 함께 고타마 부처의 임종을 보러가다가 뱀에 물려 사경을 헤멨다. 임종의 순간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이렇게 생각했다. ”완성자의 얼굴은 어떤가를 보기 위하여 그 완성자의 평화를 호흡하기 위하여, 고타마한테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제 고타마 대신에 싯다르타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잘된 일이라고, 고타마를 만난 것 만큼이나 잘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임종을 접하고 새로운 측면에서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은 감각본능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 즉 윤회의 일면임을 깨닫는다.

고타마는 아들을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이 온 것은 자기에게 행복과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나라 고통과 근심 걱정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아버지를 떠난 것처럼, 아들을 떠나보낸다. 싯다르타는 윤회란 것을 새삼 느낀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 /위키피디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 /위키피디아​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주데바의 죽음에서 부처를 보았다. 부처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스스로 깨닫는자, 그 사람이 부처다. 그걸 깨달은 싯다르타도 부처가 된 것이다. 오래 전에 떠난 친구 고빈다가 싯다르타를 찾아온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에게서 부처를 느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미소에서 자신이 수백번이나 외경심을 품고 우러러보았던 그 부처 고타마의 미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빈다는 완성을 우룬 자들은 이렇게 미소 짓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는 외할아버지가 인도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고 남인도언어 학자였던 집안 분위기 덕분에 어려서부터 힌두교, 불교 등 인도 문화에 쉽게 접근했다. 그는 1911년에 인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헤세의 소설에서 싯다르타는 흐르는 강물에서 삶의 소리, 존재자의 소리, 영원한 생성의 소리를 듣고, 그 강물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고 무상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강은 수천 개의 눈을 가진 보디삿타바(Bodhisattava)로서 자아를 구제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로 목적을 달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으로서, 석가의 어릴 때의 이름이다. 헤세는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내면의 자아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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