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는 왜 해적의 소굴이 되었나
카리브해는 왜 해적의 소굴이 되었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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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신대륙 보물을 훔치려는 해적들, 일확천금 노리며 집결

 

북아메리카 카리브해가 해적 소굴이 된 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직후 16세기부터였다. 스페인은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엄청난 양의 금을 약탈하고, 멕시코와 볼리비아 은광에서 막대한 은을 생산했다. 그러면서 포르투갈과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해 지구를 반분했다.

뒤늦게 신대륙 개척에 참여한 나라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였다. 이들 나라는 신대륙을 선점한 스페인 식민지의 재산에 탐을 냈다. 세 나라는 왕실의 군대가 직접 나서서 약탈하기는 어려우니, 사략선을 허용하거나 해적을 묵인하면서 스페인 보물을 훔치도록 권장하거나 방조했다. 특히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는 자국 해적을 적극 지원했고, 영국 엘리자베스 1세도 사략선을 적극 활용해 스페인 왕실을 재산을 약탈했다.

스페인이 거대한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완벽하게 통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멕시코와 파나마, 페루에 거점을 형성해 육군을 주둔시키고, 해안 포대를 건축했지만, 카리브해의 작은 섬들까지 지배하지는 못했다. 특히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소안틸레스 제도는 무방비상태였다.

그 허점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해적들이 파고 들었다. 마침 유럽엔 전쟁의 연속이었다. 스페인-영국 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등이 이어지고, 전투에 참가했던 수많은 병사들은 전투가 끝나면 실업자가 되었다. 갑자기 실업자가 된 군인에게 일자리가 마땅하게 생기지 않는다. 전쟁에서 배운 것이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것이었으니,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돌아오자 퇴역군인들이 전투의 연장선을 찾은게 해적이었다. 가뜩이나 산업혁명 전에 런던과 파리는 실업자로 득실거렸다. 어차피 굶어죽을 판에 한탕해보자는 심리가 생겨난다. 누구는 카리브해로 가서 떼돈을 벌었다더라는 소문이 돈다. 해적 투기판이 형성되었다.

합법적 해적은 사략선(privateer)이다. 정부로부터 약탈 허가장을 받으면, 적성국 전함과 상선, 식민지를 마음껏 약탈할수 있다. 약탈한 것을 국왕에게 선물하면 기사작위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이 존 호킨스,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헨리 모건이다.

자국 정부가 적국과 평화교섭에 성공해 사략행위를 중단하면 본격적으로 해적활동에 나선다.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사략활동에 나선다.

사략과 해적의 행동에선 차이점이 없다. 나포, 약탈, 살인, 방화의 형식은 같다. 다만 자국 정부의 승인을 받을 경우 사략이고, 승인 없이 하는 행동이 해적이다. 영국 정부로부터 약탈 허가장을 받은 윌리엄 키드(William Kidd)는 정부가 지정하지 않은 무굴 제국의 선박을 나포, 약탈하다가 해적으로 지목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법정 논쟁의 쟁점은 약탈 대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카리브해는 열대지역이어서 정글이 많고 해안에 숨어 있을 곳이 많다. 게다가 백사장이 펼쳐 있는 곳에는 스페인의 정규해군이 정박하지 못해 작은 배를 운영하는 해적들에겐 소굴을 형성하기에 안성맞춤의 지형구조를 갖췄다.

종교적으로도 적대행위가 합법화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신교 프로테스탄트 국가였고, 스페인은 구교 카톨릭의 나라였다. 스페인 배와 정착촌을 공격해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해도 본국에서는 영웅시된다. 종교가 모든 것의 우위를 점하던 시절에 같은 그리스도교라도 다른 종파는 이교도와 진배 없었다. 해적행위가 정당화되는 풍토가 만들어진 것이다.

 

카리브 해 /위키피디아
카리브 해 /위키피디아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사략질 또는 해적질을 권장하고 나선 것은 해군 부족의 상황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아메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의 무역독점을 타파하기 위해 해적들을 활용했다. 스페인 배를 나포해 보물을 약탈해온 호킨스와 드레이크가 기사 작위를 받고 영국인들에게서 영웅으로 찬양받았다.

해적이 영웅시되는 분위기에서 사회의 일탈자들이 해적을 꿈꾸었다. 도시의 부랑자, 가정파탄자, 실업자가 카리브해로 몰려들었다. 유럽의 도시 밑바닥에서 몇푼되지 않은 돈을 벌기보다 신세계에서 일확천금을 얻자는 심리가 팽배해졌다. 한번이면 끝난다. 한탕하고 손 씻고 평생을 잘 살아보자는 그 탐욕을 왕실과 정부가 후원한 것이다.

 

카리브해 해적은 16세기에 생기기 시작해 1660~1730년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하고, 1830년대에 종식된다.

이 무법천지의 상황은 영국과 스페인이 적대관계를 정리하면서 종말을 고한다. 영국은 17세기 후반에 더 이상 해적이 필요 없어 졌다. 1699년 영국은 해적법을 제정해 식민지 법정에서도 해적행위에 대해 재판을 열고 처벌할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 정부도 1697년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 서쪽 3분의1(현재의 아이티)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고 해적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 들었다. 그후 유럽 국가들은 해적 소탕에 들어간다. 결국 카리브해 해적들은 유럽의 분열상황 속에서 활개를 치다가 안정기에 들어가면서 소멸한 것이다. 역으로, 유럽의 왕실들은 필요에 따라 해적을 이용하고, 소용가치가 없게 되자 멸종시킨 것이다.

 

영화 ‘캐리비안 해적’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영화 ‘캐리비안 해적’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카리브해 해적들에 대해서 전기작가들에 의해 많은 양의 서적들이 출간되었기에 자료도 풍부하다. 헐리웃의 월트디즈니 영화사는 카리브 해적들의 풍부한 소재를 각색해 시리즈물로 영화화해 흥행에 성공했다.

등장 인물도 풍성하다. 장 플뢰리(Jean Fleury), 프랑수아 르 클레르(François Le Clerc), 검은수염 티치(Blackbeard Teach), 바솔로뮤 로버츠(Bartholomew Roberts), 스티드 보넷(Stede Bonnet), 찰스 베인(Charles Vane), 에드워드 로(Edward Low). 두목급만 해도 이름이 넘친다.

찰스 존슨 선장’(Captain Charles Johnson)이라는 익명의 저자는 1724년 해적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영국 해적사’(A General History of the Pyrates)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3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책이 오늘날 영화와 소설의 교본이 되고 있다.

 

바솔로뮤 로버츠 /위키피디아
바솔로뮤 로버츠 /위키피디아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솔로뮤 로버츠다. 그는 1718년 노예수송선을 탄 선원이었는데, 서아프리카 기니만에서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끌려가 해적의 일원이 되었다. 6개월후 그가 탄 해적선 선장이 포르투갈 해군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되었고, 해적들이 그를 선장으로 선출해 해적 두목이 되었다.

그는 1719년부터 1722년까지 카리브해, 서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며 무려 400여척의 배를 나포해 약탈했다. 약탈한 물자의 액수가 무려 3,200만 달러나 되었다고 한다.

바솔로뮤는 해적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배를 타면 먹을 것도 없고 봉급도 적다. 일은 고되다. 그런데 해적선을 타면 배불리 먹고 즐길수 있다. 자유도, 권력도 누린다. 실패하면 한번 크게 떼이고 마는 거지. 어떤 게 이익이 되는지 따져볼 필요도 없다. 굵고 짧게 사는 게 내 신조야.”

하지만 그도 해적의 운명을 피해나가지 못했다. 1722년 서아프리카 기니만에서 영국 해군 군함 스왈로(Swallow) 호를 만났다. 그가 지휘하는 해적선 한척이 포르투갈 배인줄 알고 나포하려고 스왈로 호로 접근하다가 포격을 당해 항복했다. 바솔로뮤는 먼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줄 모른채 만(bay) 안쪽에 배를 정박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영국 전함이 다가와 포격을 했다. 바솔로뮤는 급히 도망치려 했으나 포탄 파편에 맞아 숨졌다.

 

카리브해 해적들이 쇠퇴한 것은 18세기초 영국 정부가 해적단속과 소탕작전을 펼치면서다. 해적은 체포되면 식민지에서 즉결 처분되었다. 1716~1726 사이에 처형된 해적 수가 400~600명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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