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을 강남으로 만든 을축대홍수
잠실을 강남으로 만든 을축대홍수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8.09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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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기상관측이래 최대 물난리…한강소교 붕괴, 송파나루·송파장 쇠퇴

 

며칠동안 계속된 기록적인 폭우로 수도 서울이 마비상태가 되었다. 곳곳에 도로가 침수되어 차량이 막히고, 출근길이 어려웠다. 가옥이 무너지고 인명피해도 속출했다. 이번 폭우는 97년전 1925년 을축대홍수의 기록을 떠올린다. 당시 홍수로 잠실과 용산이 범람하고 한강의 물길이 바뀌었다.

 

1925년 이전에 지금의 잠실은 한강 북쪽에 있었다. 그런데 을춘년 대홍수가 한강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 그해 네 번의 홍수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1차 홍수는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태풍)711일과 12일에 통과하며 황해도 이남 중부 지방에 300500의 집중호우를 쏟아내며 발생했다. 한강·금강·만경강·낙동강 등이 범람했다.

2차 홍수는 1차 홍수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났다. 열대성 저기압이 다시 다가오면서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집중호우를 뿌렸다. 16·17·18일 계속 내린 비는 한강과 임진강의 분수계 부근에서 최고 650에 달했고, 두 강이 크게 범람했다.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용산 12.74m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강의 물이 제방을 넘으면서 3만여 정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침수되었다.

3차 홍수는 8월말 양쯔강 유역에서 발생한 저기압이 다가오면서 생겼다. 관서지방에 호우를 뿌려 당시 대동강·청천강·압록강 등이 범람, 큰 피해를 주었다. 4차 홍수는 8월 말에도 열대성 저기압이 다가와 9월 초 목포와 대구를 거쳐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남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렸고, 낙동강·영산강·섬진강 등이 범람했다.

 

조선대홍수 화보 /용산역사박물관
조선대홍수 화보 /용산역사박물관

 

을축년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물난리는 한강유역에 집중호우를 쏟아낸 2차 홍수였다. 폭우로 한강제방이 무너져 내렸고, 넘쳐난 물이 용산을 거쳐 숭례문 앞까지 밀려왔다. 당시 용산 일대를 찍은 사진을 보면 물 위에 건물 지붕만 둥둥 떠 있다 모습이 보인다.

이 때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동부이촌동·뚝섬·송파·잠실리·신천리·풍납리 등이었다. 이 당시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용산역의 열차가 물에 잠겼다. 또한 뚝섬에 샛강이 생겨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지금은 자취를 감춘 피수대(避水臺)의 느티나무 윗가지까지 물이 찼다.

 

을축대홍수 시기의 용산인근 한강 범람도 /서울역사아카이브
을축대홍수 시기의 용산인근 한강 범람도 /서울역사아카이브

 

을축대홍수 이전에 지금 용산의 노들섬은 섬으로 분리되지 않고 용산쪽에 붙어 있는 모래밭이었다. 노들섬에 위치하던 지역에 신초리(新草里)라는 마을이 있었다. 1917년에 일제가 노량진과 용산을 연결하는 인도교를 놓았는데, 노들섬 자리에 모래 언덕에 석축을 쌓아 올려 인공섬을 만들고 중지도(中之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인도교는 노량진~중지도 사이 440m의 대교와 중지도~한강로 사이의 소교로 구분되었다.

1925년에 을축년 대홍수가 터지면서 중지도 부근이 물에 잠기고, 신초리도 수몰되었다. 한강소교는 완전유실되었다. 물이 빠지면서 중지도가 하중도로 남게 되었다. 유실된 소교는 10년 후인 1935년에 준공되어 현재와 같은 구간의 인도교가 건설되었다.

 

해방직후 잠실도 /서울역사아카이브
해방직후 잠실도 /서울역사아카이브

 

물길도 바뀌었다. 을축대홍수 이전에 잠실은 강북이었다. 한강은 지금 롯데월드 앞 석촌호수 자리를 흐르던 송파강으로 흘렀다. 그런데 며칠 동안 서울에 753mm의 물폭탄이 쏟아지면서 지금의 한강 자리에 새로운 물길이 생겼다. 그 물길을 신천(新川)이라 불렀다. 송파강과 신천 사이에 잠실은 섬이 되어 잠실도와 부리도가 되었다. 당시 잠실도는 여의도보다 넓었다.

1970년대에 잠실개발에 의해 옛강인 송파강을 메우고 단거리인 신천을 한강 본류로 만들면서 잠실은 강남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땅에 잠실주공아파트가 지어졌고, 부리도 인근에 종합운동장이 조성되었다. 송파강이 사라진 자리에 석촌호수가 조성되었다.

 

을축년 홍수로 식민지 조선인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4회에 걸친 호우로 전국에서 사망자 647, 가옥 유실 6,363, 가옥붕괴 17,045, 침수 46,813호의 피해가 발생했다. 32,183단보, 67,554단보 등이 유실되어 피해액은 무려 1300만원에 달했다. 이 금액은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약 58%에 해당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 일대가 범람하는 바람에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서를 잃을 뻔 했다. 그런데 그의 4대손 정규영이 첵을 궤짝에 넣어 대피하는 바람에 손실을 막았다고 한다.

잠실 일대 주민들은 자연재해에 대한 경각심을 잏지 말자는 의미에서 홍수 다음해인 1926년 을축년 대홍수기념비를 세웠다. 그 기념비가 송파구 송파동 송파근린공원에 남아 있다.

 

송파근린공원의 을축년 대홍수기념비 /박차영
송파근린공원의 을축년 대홍수기념비 /박차영

 

홍수로 인해 땅속에 묻혀져 있던 것이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홍수가 지나간 후 1925녀누 일본인 인류학자 아오노 겐지가 현재의 풍납토성을 방문한 후 백제시대의 토기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동자루솥이다. 조선총독부는 본격적인 조사를 벌여 이 유물이 발견된 곳이 백제 토성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조선고적 27호로 지정했다. 이 유적지가 지금의 풍납토성으로 한성백제의 궁궐로 유츄되는 곳이다.

또 강동구 암사동에서 신석기 토기와 석기 다수가 발굴되었다. 신석기시대 집터인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이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을축홍수 이후 서울의 풍물도 변했다. 조선시대 물류의 집산지였던 송파나루와 송파장이 물길이 바뀌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

강에 연접한 이촌동의 경우, 이 홍수로 말미암아 폐동(廢洞)이 되었다. 홍수 이후 일제는 이촌동을 폐동으로 만들어 조선인의 거주를 금지했다. 이후 일제는 용산을 일본인 상업지구로 개발하고자 했다. 지금도 이촌동 일대에 일본인이 많이 살고 일식당이 많이 있다.

 

1925년 대홍수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용산역사박물관
1925년 대홍수를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용산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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