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⑥…금관가야 병합, 남쪽 국경 확대
이사부⑥…금관가야 병합, 남쪽 국경 확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2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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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기록…3천 병력 이끌고 공격해 항복 받아내, 대가야만 남아

 

신라 이사부(異斯夫) 장군은 지증, 법흥, 진흥왕 3대에 걸쳐 활약한 장수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법흥왕 때 그의 기록은 없다. 다만 <일본서기>에 이사부가 한국 연대기와 비교해 법흥왕 시기에 등장한다.

<일본서기> 계체(繼体)천황조에 이질부례지(伊叱夫禮智)라는 신라 장군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일본식으로 표기한 이사부다. 법흥왕 16년에 해당한다.

 

<일본서기> 계체천황조를 인용해 보자.

 

계체(繼体)천황 23(529) 4월에, 임나(任那)에 있는 근강 모야신(近江 毛野臣)에게 명하기를, “임나(任羅)가 상주(上奏)한 바를 잘 물어서,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했다. 이에 모야신(毛野臣)은 웅천(熊川, 창원시 웅천)에 머물면서,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렀다. (중략) 신라는 1등 대신인 久遲布禮(거칠부), 백제에서는 은솔 彌騰利를 보냈다. 왕이 오지 않자, 모야신은 두 사신을 꾸짖어 보냈다.

신라는 다시 상신(上臣) 이질부례지(伊叱夫禮智干岐)를 보내 무리 3천을 이끌고 와서 명을 듣기를 청했다. 모야신은 멀리서 兵仗에 둘러싸여 있는 무리 수천 명을 보고 웅천(熊川)에서 임나 己叱己利城에 들어갔다.

이질부례기가 多多羅原(다대포)에 머물면서 삼가 귀복(歸服)하지 않고 석 달을 기다리며 자주 조칙을 듣고자 청했으나, 끝내 전하지 않았다.

이질부례지가 거느린 사졸들이 부락에서 밥을 구걸하다가 모야신의 부하 河內馬飼首御狩와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御狩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그 구걸하던 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주먹으로 쳤다. 구걸하던 자가 보고, “삼가 석 달 동안 칙서의 내용을 들으려고 기다렸으나 아직 전해주지 않고, 칙명을 듣고자 하는 사신을 놀리고 있다. 이제 (그들이) 上臣을 기만해 죽이려 하는 것임을 알겠다고 하였다.

이에 자기가 본 것을 상신(上臣)에게 자세하게 보고했더니, 상신이 4개의 촌[금관(金官), 배벌(背伐), 안다(安多), 위타(委陀)4개 촌이다. 다른 곳에서는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4개 촌이라 했다.]을 초략(抄掠)하고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다다라 등 4촌이 초략당한 것은 모야신의 잘못이다라고 했다.“

 

일본 사료에 나온 이 기사는 금관국 멸망시기(532)3년 전의 일이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금관국(임라) 왕이 신라가 국경을 자주 넘어 내침하니, 가야를 구해달라고 왜국에 주청을 하자, 왜왕이 대신 근강 모야신을 보내 신라와 백제의 왕을 부른다.

신라와 백제가 1등급 중신을 보냈지만, 모야신은 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는다. 이에 신라는 대장군 이사부에게 3천의 병사를 줘 금관가야 토벌에 나선다.

이사부는 3개월간 부산 다대포벌에 진을 치고 공격을 준비한다. 모야신은 이사부의 군세에 놀라 마산으로 도망을 간다. 이사부는 4곳의 부락을 초략하고, 가야인 포로를 끌고 경주로 돌아간다.

금관국왕은 모야신이 잘못해 다시 영토를 뺐겼다고 왜왕에게 보고했다. (모야신은 나중에 왜왕의 미움을 사 백제와 신라의 협공을 받은후 왜로 소환되어 대마도에 이르러 병사했다.)

<일본서기> 기사 가운데, 이사부의 직위를 상신(上臣)이라고 지칭한 대목이 있는데, 이는 지증왕 때의 이찬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법흥왕은 18(531)에 상대등이란 최고관직을 신설하고, 철부(哲夫)를 초대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철부가 2년 후에 세상을 뜨니, 사실상 이사부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재상의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이사부 기록을 <삼국사기>와 비교해 이사부의 활약을 추적해 보자.

이사부가 실직과 하슬라 군주를 맡아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해 동해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 금관가야 정벌에 나선다. 지증왕이 죽고 법흥왕 때다.

법흥왕 때, 신라와 금관가야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신라는 동해안과 울릉도를 복속시켜 동해안에서 고구려와 예(말갈), 왜의 공격로를 차단한 다음, 남부지역 초략에 나선 것이다.

 

경남 김해시 수로왕릉 가락루 /문화재청
경남 김해시 수로왕릉 가락루 /문화재청

 

삼국사기 법흥왕조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법흥왕 9(522) 3,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기에, 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보냈다.

법흥왕 11(524) 가을 9, 임금이 남쪽 변방을 두루 돌아보며 영토를 개척했다(南境拓地). 가야국 왕이 찾아와 만나 보았다.

 

법흥왕 시기에 가야는 힘에 밀려 한발한발 신라에 속국화되고 있었다. 가야 임금이 신라 대신의 딸을 받아들여 혼인동맹을 맺는가 하면, 법흥왕이 직접 가야 땅을 공격해 영토화하자, 금관국 임금이 직접 찾아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고, 사직만은 보전해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을 김부식은 짤막하게 서술했다.

법흥왕이 가야 지역의 영토를 개척할 때(南境拓地) 이사부가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사부가 10대의 젊은 나이에 가야의 땅을 뺏은 이력이 있는데다 동북 지역의 군사 총책임자로 일한 경험 등을 미루어 볼 때 법흥왕이 가야를 남경척지(南境拓地)하면서 이사부를 대동했을 게 분명하다.

 

이사부가 금관국에서 빼앗은 촌() 가운데, 금관(金官)은 김해, 배벌(背伐)과 비지(費智)는 창원시 웅천부근, 안다(安多)와 다다라(多多羅)는 부산 다대포, 수나라(須那羅)는 금관가야, 和多委陀의 지명은 고증이 되지 않는다. 즉 금관가야의 주변은 물론 본거지를 거의 빼앗고, 금관국 임금만 남겨둔 것이다.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능.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소재. /문화재청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능.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소재. /문화재청

 

이사부가 금관국을 초략하고 3년 뒤, 금관국 구해왕은 신라에 나라를 들어 바친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기에 평화적 항복을 선택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공백을 <삼국사기>가 메워준다.

 

법흥왕 19(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등 세 아들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금관국은 수로왕이 건국한후 10대 구해왕(삼국유사엔 구형왕)대에서 그 명을 다한다.

법흥왕은 금관국을 들어바친 구해왕에 대해 유화조치를 내린다. 구해왕을 최고관직인 상대등 자리를 주고, 통치하던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아 세금을 걷어 쓰게 하고, 세 아들에게 신라 최고의 관직까지 오르게 배려했다. 신라(경주) 김씨와 가야(김해) 김씨의 세력이 연대를 형성한 것이다.

금관국은 철의 나라였다. 금관가야는 일찍이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철제품을 낙랑과 왜, 신라등에 거래했다. 초기 가야연맹의 맹주 역할을 한 금관가야는 이사부에 의해 종언을 고한다.

금관국을 병탄한 이후 신라는 녹국(㖨國, 합천군 쌍책면 성상리), 탁순국(卓淳國, 창원 인근), 안라국(安羅國, 함안)으로 진출했다

가야 연맹은 이제 고령의 대가야만 홀로 남게 됐다. 후기 가야의 맹주 대가야도 이사부와 그의 부하 사다함에 의해 성문이 열리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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